8년 전인 2013년 11월, 모스크바에서 한 동양인 할머니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었는데요. 소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현대 무용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의 성은 박, 박영이라는 조선어 이름도 있었지만 주로 박 비비안나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한반도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창립자이자 북한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의 딸입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던 박헌영은 1928년, 부인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건너 갔습니다. 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였고 그곳에서 딸 비비안나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박헌영의 소련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박헌영은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는 중 혁명활동을 위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박헌영의 귀국은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소련 정부의 지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린 딸과 부인은 소련에 남았습니다. 당시에 소련에는 공산주의 혁명가의 자녀들이 많이 머물렀고 그들을 위한 특별한 기숙학교까지 있었습니다. 비비안나는 이 학교를 다니며 매우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녀와 함께 학교를 다닌 사람들 가운데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도 있습니다. 모안영은 나중에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전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북한은 소련의 이 같은 기숙학교를 많이 모방했는데요. 만경대 학원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비비안나는 기숙학교 때부터 무용과 음악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1943년 15살 때 무용 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녀는 졸업 이후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모이세예프 무용단에서 20여 년 동안 무용가로 활동했습니다. 모이세예프 무용단은 북한을 몇 차례 방문해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53년 박헌영은 북한에서 미제 고용간첩으로 체포되고, 처형됐습니다. 이런 상황이 소련에 머물던 비비안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아무 영향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련공산당 간부 누구도 박헌영이 간첩이라는 북한 당국의 주장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련 정부의 비밀자료는 거의 모두 공개되었는데요. 소련 정부가 박헌영과 다른 남한 출신 혁명가들에 대한 숙청을 북한의 권력투쟁으로 보고 있다는 자료도 공개됐습니다. 소련 외교관, 공작원, 군인들 모두 박헌영을 간첩이 아니라 그저 권력투쟁의 패배자로 여겼습니다.
이후 비비안나는 아무 문제 없이 공연을 다녔고 해외 공연도 많이 했습니다. 예술가들 특히 무용가들은 개인 생활이 혼란스러운 경향이 있지만, 비비안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로 소련인 화가와 결혼했고 오랫동안 잘 살았습니다. 딸들이 태어났고 손자와 증손자까지 직접 보았습니다. 그녀는 나이 들어서까지 무용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다가 2013년 11월, 85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이런 비비안나가 노년까지 후회했던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녀는 1949년 북한을 방문했고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이었던 아버지, 계모 그리고 이복여동생과 만났습니다. 비비안나는 계모와 이복여동생을 좋아했고 1950년 여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을 소련으로 데려오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계모는 거절했고 이후 두 사람은 박헌영과 함께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비비안나는 자신이 더 열심히 설득했다면 가족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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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I LANKOV, 에디터:오중석,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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