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6월 4일이라는 숫자는 매우 강한 정치적 의미가 있습니다.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 사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안문 사태는 지난 30년 동안 중국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중국 언론 어디에도 천안문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중국공산당이 이 사건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32년 전 북경의 천안문에서는 어떤 일이 생긴 걸까요? 1980년대 중국은 경제개혁과 시장경제 도입 덕분에 생활수준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게 되었고,많은 사람들은 경제발전 뿐만 아니라 정치변화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반정부 시위대는 사상도, 의견도, 희망도 매우 다양했는데요. 자유주의 경향도 있었고, 권위주의 경향도 있었고, 심지어 극좌익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다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모든 정치생활을 통제하는 체제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 1989년 봄 북경에서는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위는 갈수록 규모가 커졌고, 지지도 높아졌습니다. 반공산당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달한 1989년 5월, 천안문광장에 모인 사람은 거의 100만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를 시작한다면 중국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1989년 중국에서 민주화 혁명이 생겼다면, 공산당 간부 대부분은 권력과 특권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절대 환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력진압을 결정했습니다. 공산당 지도부는 이 진압이 나라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하지만 진압 결과를 보면 공산당 지도부는 죽을 때까지 나라를 통치했으며 자신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을 최고 부자들로 만들었습니다.
1989년 6월 초, 중국군대는 천안문광장을 포위하고 시위대에게 해산을 요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포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시위대 대부분은 압박에 굴복해서 광장을 떠났지만, 그래도 10만명 정도는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거의 모두 청년학생들이며 핵심은 중국 최고 대학인 북경대학 학생들이었습니다. 6월 4일 새벽 중국군대는 진압을 개시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산당 지도부가 당시에 일부러 시골에서 군대를 동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도부는 북경 주둔군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광장에 진입하고, 사람들을 마구 때린 다음에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탱크까지 들어갔는데요. 싸우는 시위대 뿐만 아니라, 광장에서 도망치는 사람들도 사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북경 중심부는 결국 피가 철철 흐르는 도살장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국사람들이 배운 것은 공산당은 정부에 도전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백명이나 수천 명을 학살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도 경제개혁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등소평과 중국 지도부가 잘 알았던 것은, 힘과 공포로 오랫동안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정치부문에서 독재국가이지만, 경제에서 개혁개방을 하고 빛나는 경제성장을 달성했습니다. 그래도 중국 당국이 천안문사건에 대한 기억을 아예 없애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당국은 여전히 민주화 운동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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