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한국 외교부는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북한 핵이 국제사회 문제로 떠오른 1992년 외교 문서 36만여 쪽을 비밀 해제했습니다. 당시 이뤄진 첫 미북 고위급 회담 비화 등이 공개됐습니다. 서울에서 홍승욱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 외교부는 6일 남북이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한 이듬해인 1992년 작성된 문서를 중심으로 외교문서 36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소련 해체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으로 국제정세가 급변한 가운데 북한 핵 문제가 급부상한 배경 등이 문서에 담겼습니다.
1992년 1월 당시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이 뉴욕 유엔주재 미국대표부에서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나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발언을 한 상황을 뒷받침하는 내용도 확인됐습니다.
이에 따르면 같은 해 3월 방한한 리처드 솔로몬(Richard Solomon) 당시 미국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이상옥 한국 외무부 장관을 만나, 캔터·김용순 회담 당시 북측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안정의 요소(source of stability)로 인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은 당시 동·서 냉전체제 붕괴에 이어 중국마저 한국과 수교 관계를 맺자 여러 차례 주한미군 주둔 용인 입장을 시사하는 등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북 관계 개선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김일성 당시 북한 국가주석은 1992년 4월 미국 워싱턴타임즈와 가진 기자설명회에서 주한미군에 대한 유화적인 입장과 함께 미북 관계 개선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수년 뒤인 2000년 6월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당시 한국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이 지역 안정을 유지한다”며 주둔 필요성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이 1990년 한·러 수교에 이어 1992년 한·중 수교까지 성공하자 북한이 이에 충격을 받은 당시 상황도 공개됐습니다.
수교 직전 중국 방문에 앞서 북한을 찾은 후카다 하지메 당시 일본 사회당 의원은 “북한 노동당 간부들이 한·중 수교에 대해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는 자세가 역력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주홍콩 한국총영사가 일본영사로부터 들은 내용을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김정일은 장시간의 내부 연설을 통해 “일부 공산주의 국가들이 돈 때문에 공산주의 원칙마저 포기하고 있다”는 등 중국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한국과 북한 대사관 공관원들이 고립된 뒤 목숨을 걸고 힘을 합쳐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한 사건 관련 상황도 문서에 담겼습니다.
이에 따르면 강신성 당시 주소말리아 한국대사는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있는 동안 북측의 딱한 처지를 악용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언행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극력 회피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오히려 북측을 우대한다는 자세를 견지했다”면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삼갔다”고 말했습니다.
기자 홍승욱,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