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역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미북 정상회담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양측은 북한 비핵화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차례 회담을 벌인 바 있는데요. 역대 미북 고위급회담 사례를 서울의 목용재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이후 미북은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두고 치열한 협상과 대립을 반복해왔습니다. 과거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북 정상회담도 추진된 바 있지만 결국 무산됐습니다. 이 때문에 12일 열리는 미북 정상회담의 의미는 더 큽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도 11일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미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되길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 이제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염원하는 전세계인들의 바람이 실현될 수 있도록 두 지도자가 서로의 요구를 통 크게 주고받는 담대한 결단을 하길 기대합니다.
북핵 문제로 미북 간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된 것은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부터입니다. ‘1차 북핵위기’는 북한이 지난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불거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양측은 지난 1993년 6월 처음으로 협상장에서 마주했습니다. 북핵을 둘러싼 미북 간의 치열한 공방이 시작된 겁니다. 1993년 6월부터 7월까지 열린 미북 고위급회담을 통해 북한은 NPT 탈퇴 유보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듬해인 1994년 6월 이 같은 입장을 번복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직접 폭격할 계획까지 세우지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전격적으로 만나면서 이 같은 위기 상황은 잠시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은 1994년 10월 핵시설 동결과 조건부 핵시설 해체를 골자로 하는 ‘제네바 미북 기본합의문(제네바 합의)’에 서명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차원으로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매년 중유를 공급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제네바 합의의 후속 이행 조치는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면서 중단됐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은 1999년 북핵 문제 해법으로 대북 포용정책인 ‘페리 프로세스’를 내놨고 이에 따라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를 선언했습니다. 미북관계가 다시 해빙기를 맞이한 겁니다.
미국의 대북 유화정책과 한국의 대북 유화정책인 ‘햇볕정책’이 맞물리면서 미북 정상회담도 추진됐습니다. 이를 위해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2000년 미국을 방문하고 미북은 양국의 적대관계를 청산하자는 내용의 ‘미북 공동 코뮤니케’를 채택합니다. 이에 대한 후속 조치 차원에서 미국 국무장관으로서는 최초로 매들린 올브라이트 장관이 방북해 미북 정상회담 준비 작업까지 벌였습니다.
당시 기대를 모았던 미북 정상회담은 미국 공화당 소속의 조지 부시 후보가 새로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무산됐습니다. 이후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을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됩니다. ‘2차 북핵 위기’였습니다.
이같은 의혹에 북한은 HEU개발을 시인하고 핵동결 해제, IAEA사찰관 추방, NPT탈퇴 선언, 원자로 재가동 등의 조치를 취하고 핵개발을 재개합니다. 이때부터 북핵 문제는 미북 양자 차원이 아닌 다자협의체인 ‘6자회담’의 틀에서 논의됐습니다.
2003년부터 시작된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 방안을 담은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습니다. 북한은 공동성명을 통해 NPT, IAEA 복귀와 핵개발 포기를 약속했고 한국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북한에 에너지를 지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 비핵화에 대한 전세계의 기대감이 커졌지만 공동성명 채택 직후 이뤄진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로 공동성명 이행에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미국의 제재 대상은 BDA에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비자금 계좌였습니다. 이에 대한 북한의 반발은 2006년 첫번째 핵실험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미북 간의 대립이 격화된 상황에서 6자회담과 미북 양자 회담이 진행됐고 결국 2007년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단계 조치 합의’, 즉 ‘2.13 합의’가 발표됩니다. 2.13 합의는 미국이 BDA 제재를 해제한 이후 이행됐습니다.
북한은 2007년 2.13 합의에 따라 핵시설 동결, 냉각탑 폭파 작업을 진행했지만 2008년 들어 이미 합의된 북핵 검증 방법에 대해 다시 반발했습니다. 이에 따라 6자회담에서 나온 공동합의문도 사실상 유명무실화 됐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집권을 전후로 미북은 협상을 재개했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 2012년 글린 데이비스 당시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김계관 외무성 1부상 간 협의를 통해 ‘2.29 합의’가 도출됐습니다. 북한의 핵동결, 미사일발사 유예와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을 주고받는 내용이 골자였습니다. 하지만 이 합의 이후 북한이 다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2.29 합의도 사문화됐습니다.
그동안 북핵 해결방안을 둘러싸고 미북은 합의와 파기를 반복해왔습니다. 2012년 이후 공식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던 미북이 사상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가운데 과거의 사례가 반복될지, 진전된 비핵화 합의를 이뤄낼 지 주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