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한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의 개정 노동당 규약과 관련해 일각에서 제기된 북한이 더는 통일을 지향하지 않고 있다는 해석은 성급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서울에서 홍승욱 기자가 보도합니다.
16일 서울에서 열린 북한 개정 노동당 규약 관련 토론회.
한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개정 당규약을 통해 사실상 통일을 포기한다는 입장을 시사했다는 일각의 분석과 관련해 다소 성급한 평가라고 지적했습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이 자리에서 북한이 기존의 한국 내 투쟁을 지원해 이른바 ‘남조선혁명’을 성공시켜 통일하겠다는 비현실적인 전략을 ‘강력한 국방력’을 통한 방법론으로 수정했을 뿐, 통일 의지를 내려놓고 두 개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분석했습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 :북한의 혁명 전략은 혁명주의적 통일전략, 군사주의적 통일전략 중 한 쪽으로 기울거나 이 두 가지를 배합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는데 지금은 군사주의적 통일전략 쪽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의 방식이 바뀐 것일 뿐, 남조선 혁명론을 포기했다고 해서 통일을 포기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성장 센터장은 북한이 지난 2018년 미국과의 대화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강력한 국방력을 앞세워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진단했습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지난 1월 8차 당대회에서 전술핵무기 개발과 핵잠수함 개발 의지 등을 밝힌 것도 그를 뒷받침한다는 설명입니다.
정 센터장은 북한이 꾸준히 미국에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 특히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대화 재개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사실상 대화 의사가 없다는 말과 같다며, 이 부분에 대한 남·북·미 등 당사국들의 대타협이 이뤄지지 않는 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3월 담화를 통해 한미 연합훈련을 비난하며 남북 군사합의 파기와 대남 대화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금강산국제관광국을 비롯한 관련 기구 폐지까지 시사한 것을 감안하면 한미 간 연합훈련에 대한 합의가 어떤 형태로든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남북대화 재개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내놓았습니다.
다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에 대해 기존보다 유연한 입장을 나타낸 바 있는 만큼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에 호응할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김정은 총비서가 지난 2018년 신년사에서 미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가 극적으로 미국과의 대화에 나섰던 점을 언급하며, 올해도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 북한의 핵능력 감축과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에 대한 미북 간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와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도 같은 토론회에서 이른바 북한 ‘통일포기론’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동엽 교수는 북한의 개정 당규약에 여전히 ‘조국의 평화통일’이라는 내용이 명시된 만큼 이 같은 당의 존립 근거와 목표까지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통일'은 '평화 공존'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홍민 연구위원도 통일은 북한 노동당의 핵심과업이자 체제의 존재 이유를 구성하는 기반으로, 개정 당규약이 통일을 포기했다는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전문가들은 당규약 상에 나타난 ‘인민대중제일주의’에도 주목했습니다.
김동엽 교수는 북한의 개정 당규약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가 부각된 반면 김일성과 김정일의 실명은 사라진 것과 관련해 기존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명목상으로 계승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이를 김정은 총비서의 통치방식인 ‘인민대중제일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김 총비서가 8차 당대회에서 강조한 ‘김일성·김정일주의’, ‘인민대중제일주의’, ‘자력갱생에 입각한 경제건설’, ‘강력한 국방력 건설’ 등을 개정 규약에 반영함으로써 현실과 상당 부분 괴리를 보였던 기존 규약에 시대변화를 투사한 것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홍민 연구위원도 북한이 개정 당규약을 통해 기본 정치방식을 ‘선군정치’에서 ‘인민대중제일주의정치’로, 전략노선을 ‘병진노선’에서 ‘자력갱생’으로 수정했다며 김 총비서가 8차 당대회를 통해 당 중심의 자기 정치를 전면화하고 최근 조성된 정세에도 대응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새 당규약이 김일성·김정일 등 선대 지도자의 이름과 ‘주체’, ‘선군’ 등 선대 통치 관련 용어를 배제하고 실용주의 기조와 당 조직 자체에 힘을 싣는 데 집중했다는 설명입니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기존의 최고 존엄을 중심으로 당의 모든 것에 대한 논리적인 체계를 맞추려고 했던 것에서 당의 조직적인 운영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서술의 관점이 바뀐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고지도자나 선대의 전통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기본 바탕에 깔고 있지만, 서술 관점이 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홍 연구위원은 북한의 핵 관련 담론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며, 북한이 지난 2019년 이후 핵 관련 용어를 ‘평화’라는 말과 함께 쓰면서 핵무기가 이른바 평화수호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2020년 이후 북한이 핵무기 개발과 보유를 ‘평화’ 담론과 연결 지어 정당화하려는 기조와 연결되는 것으로, 북한이 개정 당규약을 통해 외부적으로는 평화 유지, 내부적으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려 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