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한국 통일부가 지난달 발표한'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보고서'에 따르면 탈북민 2명 중 1명 이상이 뇌물 공여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북한에서 주민들에게 뇌물이 일상이 됐음을 방증하는 조사 결과로 보이는데요, 과연 북한의 뇌물 만연 풍조가 어느 정도인지,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탈북민들 입을 통해 직접 들어봤습니다. 진민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중국에서 여덟 번 강제 북송당하고 아홉 번 만에 가까스로 탈북에 성공해 2007년 한국에 정착한 이순실씨. 이 씨가 기억하는 북한 삶의 일부는 70~80%가 뇌물로 통했고, 뇌물 없이는 더 나은 삶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겁니다.
[ 이순실(2007년 탈북)] 북한에서는 뇌물이라는 게 아이 때부터 다 겪어오는 거라고 보면 돼요. 그런 것만 보고 배워서 어른들이 하는 말은 "야, 갖다 고이라 고이라 고이면 다 된다," 고이는 게 뇌물이에요 뇌물. 고이다는 말이 (뇌물이에요). 장난 아니에요. 그러니까 (북한은) 모든 게 뇌물 아니면 되질 않아요. (삶에) 한 70~80%는 뇌물이라고 보면 돼요.
초등학생 시절부터 익히 들어오고 배워온 ‘고여야 한다는 말, 뇌물을 바쳐야 자신이 뜻하는 바에 가까워진다는 사실’. 북한 군 간호장교 출신인 이 씨는 북한에서 이런 상황은 학교를 졸업하고 심지어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하는 입대 과정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고 전했습니다.
[ 이순실(2007년 탈북)] 군대 가야 하는 애들 신체검사하는 거 보면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간부 집 아이들은 다 의사들한테 뇌물을 고이다 보니까 다들 불합격이 나오는 거예요. 의사들하고 짜서 병 있는 걸로 조작을 해 놓죠. 노동자나 농민 집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진짜 신체도 영양실조 걸린 것 같은 애들은 다 합격해서 제일 어려운 산속에서 사는 고사총 중대에 가 있고 군의소 가보면 사단 군의소에 70~80명이 한 개 중대에 있는데 이 70~80명이 거의 다 간부 집 딸들이에요.
계급적∙경제적 여력이 있는 부모들조차도 자식을 조금이라도 환경이 나은 곳에서 군 복무할 수 있도록 예외 없이 재력과 권력을 몽땅 동원해 군 간부에게 뇌물을 바친다는 겁니다.
지난 2월 초, 한국 통일부는 2013년부터 2022년 사이에 탈북한 6천 3백여 명을 대상으로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에 관해 1대 1 설문 조사한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이후 월 수익의 30% 이상을 수탈당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41.4%, 특히 2016년부터 2020년 사이에 뇌물을 공여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54.4%, 다시 말해 2명 중 1명은 뇌물을 제공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또 보고서 설문조사 문항 중 ‘뇌물은 불가피한 급행료다'라는 질문에 대해 탈북 시기와 지역, 연령대와 무관하게 반수 이상의 탈북민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2002년 탈북에 성공한 이 모 씨(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 요청)는 지난달 27일, RFA 자유아시아방송에 탈북 당시 국경경비대원에게 북한 돈 2천 원을 쥐여 주고 그들의 보호까지 받으며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 이 모 씨(2002년 탈북)] 밤에 국경경비대가 우리를 안내해서 얼음이 많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게 하는데 이렇게 소총을 매고 강을 건너보내는데 "갔다가 다시 잡혀 오지 마시라요" 그때 당시 북한 돈 2천 원을 주고 건너게 됐죠.
이는 곧 김정은 정권 이전에도 이미 북한서는 뇌물에 북한을 벗어나는 국경이 활짝 열릴 만큼 일상 곳곳에 뇌물 공여가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다만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뇌물과 관련해 각각 다른 시기에 탈북한 이들을 대상으로 취재한 결과 북한 내에서 형편에 따른, 그리고 시대에 따른 뇌물 가치와 형태의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2010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식 석상에 처음 얼굴을 드러낸 시기 직전까지 북한 내 사법기관에서 근무한 김 모 씨(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 요청)는 그 당시만 해도 가장 흔한 뇌물이 ‘담배 종류’였다고 귀띔했습니다.
[ 김 모 씨(2010년 탈북)] 딱 봤을 때 (단속원이) 허름하게 입고 바지 주름이 잘 안 서 있고 이러면 대충 담배를 주면서도 그렇게 고급은 아니고 중급 정도의 담배 한 갑 정도면 되겠다고 판단하고 바로 사다주는 경우가 있고, '조금 이 사람은 쉽지 않겠다'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고양이 담배 한 갑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하죠. 고양이 담배라고 하면 북한서 굉장히 뇌물로 많이 사용되는 담배거든요.
결국 북한서는 뇌물을 주고받는 데에도 급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김 씨는 또 하나 변화가 1995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이래 북한에서 고양이 담배 정도 고급 뇌물은 간부들이 오롯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간부들조차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받은 뇌물을 모아서 장마당에 되팔아 식품이나 생필품을 마련하는 수단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 김 모 씨(2010년 탈북)] 담배를 받았다고 그 담배를 피우지는 않아요. (뇌물도) 돈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 담배는 한꺼번에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담배 장사꾼들한테 넘겨줘서 쌀이나 다른 어떤 (생필품 같은) 것들로 교환을 하죠.
반면 2016년 탈북하기 전까지 북한 보위부에서 근무했던 정 모 씨(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 요청)는 2009년 북한에서 휴대전화(손전화) 서비스가 본격화되고, 이듬해인 2010년 휴대전화(손전화)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북한 사회에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와 함께 또 한 번 변화한 게 바로 뇌물 문화. 정 씨 아버지가 보위부 간부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고양이 담배가 일상적인 뇌물로 통용됐지만 정 씨가 근무하던 2016년 직전 시기에는 보위부 간부급 뇌물로는 현금, 특히 달러가 일반적이었다는 겁니다.
[ 정 모 씨(2016년 탈북)] 제가 진짜 어릴 때는 고양이 담배가 통했어요. 저희 아버지도 보위부에 계셨는데 그때 당시에는 고양이 담배만 (뇌물로) 줘도 그냥 그랬는데 그건 제가 초등학교 때 소립니다. 지금은 고양이 담배 주는 사람도 없고 다 달럽니다, 다 달러예요. 음란물을 봤다 하면 기본적으로 농촌에서 (뇌물을) 제일 적게 받아서 300달러 선부터?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음란물을 보는 사람들은 없어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500달러, 1,000달러, 많게는 2,000달러, 3,000달러 받기도 해요.
현재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정 모 씨는 북한 외부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은 자본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북한에서 뇌물은 어쩔 수 없는 상부상조의 개념이었다고 기억을 되짚었습니다.
[ 정 모 씨(2016년 탈북)]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체제라고 해서 배급을 주는데, 그것만으로 살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먹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쓰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 걸 북한은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에 맞게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뇌물 주는 사람들하고 서로 "야, 검열 들어간다." 검열 들어가면 일단 법기관부터 일단 먼저 알려 지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한테 알려 줍니다. "나 이제 검열 들어가니까 조심해라".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게 북한 실태고요.
이 같은 북한의 만연한 뇌물 만능주의 현상에 대해 북한대학원대학교 임을출 교수는 과거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이 민주주의로 발전하지 않는 한 변화나 개선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 임을출] 한국 사회도 과거에 이런 뇌물이 많이 유통됐죠. 오늘 북한도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는데 이 뇌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사회가 개방되고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정치 및 경제적 선진화가 이뤄져야만 뇌물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겁니다. 그 때문에 현 단계에 북한에서 이런 사회로 전환되는 것이 굉장히 쉽지 않은 그런 상황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북한서 이 뇌물 문화는 점점 진화하고 발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죠.
미국에 본부를 둔 국제 뇌물 감시 민간 단체 트레이스 인터내셔널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2023년 뇌물위험지수’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의 뇌물위험지수는 100점 만점에 92점, 194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194위로 2020년 이후 4년 연속 이 단체가 꼽은 뇌물위험도가 최악인 나라로 지목됐습니다.
하지만 현재 김정은 정권이 보다 강력한 사회주의 체제를 굳히기 위해 주민들을 더욱 통제하고 봉쇄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만큼 북한의 뇌물 문화는 더욱 진화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