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북한이 수천 명의 병력을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를 돕기 위해 파병하면서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습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의 과거 베트남 파병 사례를 보면 향후 북한군이 어떤 역할을 할지 예측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조진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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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베트남(윁남)전과 1973년 중동에서 벌어진 욤키푸르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전쟁 중 베트남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되었고 규모도 훨씬 컸습니다.
1965년 김일성 주석은 서방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북한의 젋은 전투 조종사들을 북베트남으로 보냈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최초이자 가장 어린 북한 조종사는 1965년 9월 24일 19세의 나이로 사망한 원홍상입니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도부는 미군에 맞선 전쟁에서 더 큰 역할을 맡으려는 의지를 꺽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의 요청
베트남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1960년대 김일성 주석이 자발적으로 젊은 병사들을 북베트남에 파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조종사들이 절실히 필요한 베트남의 요청이었다는 통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처음으로 파견된 북한 조종사들은 1965년 하노이에서 소련이 지원한 전투기 훈련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더 많은 인력이 파견되었습니다.
베트남 공군 사령관이었던 풍 테 타이는 1966년 9월 21일 북베트남 군사 당 위원회 회의에서 "우리 친구들이 베트남에서 싸울 공군 부대 파견 허가를 요청했다"며 북한을 언급했습니다.
이후 베트남군 총사령관 보 응우옌 잡의 승인을 받아 북베트남과 북한은 조종사 파견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북한은 약 100명의 인력을 북베트남 공군에 보냈습니다.
한국 군사연구소는 북한이 ‘수백 명’의 조종사를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베트남 역사학자들은 이 수치에 이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북한이 기술력과 공중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외국 군대가 자신들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고 북한과의 관계에 정통한 베트남 소식통이 전했습니다.
이 소식통은 “1964년 회담에서 호치민 당시 국가주석이 김일성 주석에게 북한의 지원 제안을 감사히 여기지만 ‘물자 지원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조종사들의 전투 경험과 소련제 항공기에 대한 적응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하자 베트남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습니다.
그는 “하지만 북한 조종사들이 자주 격추당했고 비행기 손실도 컸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군의 높은 전투의지
베트남 전쟁 전문가로 활동하는 전 미 국가정보국(CIA) 요원 머를 프리벤노우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북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파견된 사실은 전쟁이 끝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2000년에야 비로소 공개됐습니다.
북한 조종사들은 ‘Z부대’라는 연대급 비행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이들은 1967년 초부터 1968년까지 하노이 북동쪽에 있는 캡 공군기지에 주둔했다고 프리벤노우는 밝혔습니다.
북한이 이 부대를 베트남에 보낸 이유는 베트남 공군의 성공에 크게 감명받았기 때문이라고 베트남 인민경찰 신문은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베트남 공군의 가장 경험 많은 장교들이 북한 조종사들을 정성을 다해 지도했으며, 미그-16과 미그-19 전투기 조종에 필요한 가장 어려운 기술을 가르쳤다”고 전했습니다.
북한 조종사들은 ‘매우 높은 전투의지’로 유명했고, 일부 조종사들은 사고 시 전투기와 함께 죽을 각오로 좌석에 스스로를 체인으로 묶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트남 공군의 팜 푸 타이 중장은 2023년 회고록에서 1967년 7월21일 전투에서 북한 조종사들이 미군 항공기 5대를 격추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 3대를 격추한 것으로 인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3명의 북한 조종사들이 전사했다고 밝혔습니다.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북한 조종사들은 1천266회 출격해 미군 항공기 26대를 격추하고 미군 조종사 8명을 생포했다고 그는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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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희생
베트남에서 전사한 북한 조종사 14명의 유해는 하노이 인근 박장성에 위치한 유일한 외국인 전쟁 영웅 묘지에 묻힌 뒤 북한의 요청으로 2002년 평양으로 이송됐습니다.

미국 민간연구기관 랜드연구소의 북한 전문가 벤자민 영 박사에 따르면 북한 국영언론은 베트남전을 서방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는 제3세계 무장 투쟁의 일부로 묘사했습니다.
영 박사는 RFA에 “김일성 시기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에 북한의 사회주의, 국제주의가 황금기를 맞이한 시기였다”며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도 북한 선전매체에 ‘새로운 다극 세계’ 건설 시도로 묘사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남북 관계의 영향
또한 베트남에서 북한의 개입은 남북한 관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북한은 조종사들 외에도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한국군이 작전 중인 지역에 특수부대를 파견했는데 “그들의 전술, 전투 기술, 전투 준비 상태 및 사기를 조사하고, 한국군에 대한 선전 활동을 펼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1967년 7월 6일 루마니아 정부에 보낸 비밀 전보를 통해 밝혔습니다.
영 박사는 이를 두고 “김일성이 남베트남에서 한국의 군사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더 많은 북한군이 배치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영 박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북 간의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영 박사는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치명적인 지원을 공개적으로 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당시 미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을 역임한 에릭 에델맨 미 의회 산하 국가방어전략위원회 부원장도 최근(29일) 안보 토론회에서 이미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군사지원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한국의 (무기) 생산 능력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미국이 제공한 무기로 러시아 영토 내 군사목표물을 타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한을 해제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에델멘 부원장]이 시점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미국이 제공한 장비로 러시아 내 정당한 군사 목표를 타격하지 못하도록 한 제한을 해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서방 분석가들은 김일성 주석이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압박을 덜기 위해 미국이 베트남에 몰두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약 10년 뒤에 태어난 그의 손자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하는 것을 기쁘게 여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