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미국 정부 당국자가 최근 잇달아 북한 비핵화의 '중간단계 조치'를 언급했습니다. 미국이 핵 군축 협상 가능성을 내비쳤다는 일부 해석까지 나오는 가운데, 미 당국자의 발언이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는 전문가 분석이 제기됐습니다. 서울에서 한도형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4일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중앙일보-CSIS 포럼 2024’에서 “현재 한반도 상황을 고려할 때 위협 감소(threat reduction)를 위해 북한과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며 “만약 전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단계’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5일 정 박 미국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겸 대북고위관리는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비핵화는 하룻밤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현실”이라며 “궁극적인 비핵화로 향하는 과정에 ‘중간단계 조치’(interim steps)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행정부 인사의 잇단 ‘중간단계’, ‘중간조치’ 언급과 관련해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11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통화에서 “북한과 대화의 문은 계속 열려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정도의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정부가 핵 군축 협상 가능성을 내비쳤다는 분석이 전문가, 언론 등 한국 사회 일부에서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미국 당국자들은 ‘북한 비핵화’라는 목표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미라 랩-후퍼 선임보좌관은 지난 4일 “미국의 목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고 언급했고, 정 박 대북고위관리는 미 현지시간으로 5일 ‘군축에 열린 입장이냐’는 질문에 대해 “한반도 비핵화라는 우리의 목표는 분명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또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5일 정례기자설명회에서 랩-후퍼 선임보좌관의 발언과 관련해 “정책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의 말입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큰 틀에서는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비핵화를 하는 과정에서 중간단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단계적 비핵화를 해야 되는 것이죠. 이야기한 걸 들어봤는데 기존에 갖고 있는 핵심적인 목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혹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입장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이날 자유아시아방송에 최근 미 정부 인사로부터 나온 ‘중간단계’, ‘중간조치’ 언급은 “비핵화가 궁극적인 목적이지만 중간에 여러 단계의 협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김 교수는 또 미라 랩-후퍼 선임보좌관의 직책이 바이든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할 만큼 높은 직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굉장히 기본적인 일반론 차원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높은 직책에 있는 분도 아니셨고 제 생각에는 바이든 행정부, 바이든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굳이 그 분의 입을 통해서 그런 발언을 하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좀 드는 것이죠.
김 교수는 최근 김영호 한국 통일부 장관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목표라고 재차 강조한 것은 미 정부 인사의 ‘중간단계’, ‘중간조치’ 언급과 관련해 “한국 사회 일부에서 다소 과민하게 반응하는 현상에 대해 분명히 대응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지난 8일 올해 업무 추진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정부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북한의 핵을 용인하는 군축회담 관련 논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와 함께 북한의 비핵화라는 목표는 그대로 두면서도 대화의 문턱은 다소 낮추었다는 분석도 제기됐습니다.
임을출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날 자유아시아방송과의 통화에서 “북한이 그동안 미국의 대화 제의에 움직이지 않자 대화의 문턱을 조금 낮추는 차원에서 ‘중간단계’ 목표를 제시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밝혔습니다.
임 교수는 이어 북한이 지금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와 협상을 해도 실익이 없다는 판단을 하겠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중간단계’ 논의를 지금보다 진지하게 검토하고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임을출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과거 오바마 행정부도 그랬고 부시 행정부도 그랬고 임기 말에 가서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다보면 결국 의미있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중간에 대화 자체가 무산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북한은 이런 부분과 관련한 학습효과를 갖고 있어요. 바이든 대통령이 다시 재선되느냐 여부에 따라서 '중간단계' 제안이 실효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결정될 것으로 저는 평가합니다.
박원곤 교수도 “북한이 11월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당장 바이든 행정부와 대화를 시도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된다”며 “이것은 ‘중간단계’를 언급한 미국 행정부 인사들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에디터 목용재,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