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한국 통일부가 남북회담 관련 사료를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해당 사료에 따르면 남북 간 분단 후 처음으로 가진 공식회담은 단 3분 간 진행됐습니다.
서울에서 목용재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 통일부가 4일 1970년 8월부터 1972년 8월까지의 남북회담을 정리한 사료집을 한국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이는 한국 국민의 알권리와 대북정책의 투명성을 위한 차원에서 한국 정부가 사료를 공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뤄진 조치입니다. 한국 정부는 지난 1월 1일 남북회담자료 공개에 관한 규정을 제정함에 따라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약 10년 간의 남북회담 문서를 올해 순차적으로 공개할 계획입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에 따르면 정전협정 이후 이뤄진 남북 간 첫 공식 회담은 지난 1971년 8월 20일 열린 남북적십자 파견원 간 접촉입니다. 이 회담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오후 12시 1분 시작돼 3분 후인 12시 4분에 종료됐습니다.
남북 양측의 첫 회담은 “안녕하십니까”라는 대한적십자 파견원인 이창렬 서무부장의 인사말로 시작됐습니다. 이에 북측은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다”라고 호응했습니다. 양측은 서로 통성명을 한 뒤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받아온 신임장을 교환했습니다.
이후 남북은 업무와 관련된 몇 마디만 주고받고 회담 대표자들이 속한 기관의 명칭만 확인한 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짧은 인사 후 회담을 종료했습니다.
한국 통일부 당국자는 “해당 회담은 25년만의 장벽을 깨고 개최된 남북 간 최초의 당국 회담”이라며 “이후 5번의 정상회담을 포함해 총 600여 차례의 남북회담이 진행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에는 지난 1971년 9월 29일 남북이 최초로 채택한 남북적십자예비회담 진행 절차에 관한 합의서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는 남북 당국 간 이룬 최초의 합의입니다.
남북은 해당 합의를 통해 남북 적십자 예비 회담 장소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로 정하고 상설 회담연락사무소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한국 측은 ‘자유의집’에, 북한 측은 ‘판문각’에 각각 설치키로 했고 각 연락사무소를 연결하는 직통 왕복전화도 설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남북 간 상호 연락을 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에 대한 합의도 이뤄졌습니다. 남북 적십자 간 문서 전달이 필요할 경우엔 연락사무소 간 직통 전화로 연락을 취한 뒤 양측의 근무자가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만나 전달하기로 한 것입니다.
연락사무소 근무 인원의 경우 양측 각 2명으로 근무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12시, 일요일은 휴무로 결정했습니다.
회의의 기록과 관련해선 양측이 자체적으로 하되 상대방에 편의를 제공해 확인하게 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기자들의 취재 편의를 위해 회의 개시 전까지 회의장 내 취재 허용과 기자실의 확성기 설치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한국 통일부 당국자는 “당시 합의 내용들이 현재까지 남북회담을 운영하는 기본 틀로 적용되고 있다”며 “수행원 수, 회의기록 방법, 발언 형식, 순서 등 회담의 일반적 방식을 규정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남북이 1972년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최초 5개항 합의문을 채택한 사료도 이번에 공개됐습니다.
1972년 6월 5일 개최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제13차 의제문안 실무회담 자료에 따르면 남북은 이산가족의 주소 및 생사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 자유로운 서신 교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해결 등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5가지 항에 합의했습니다.
다만 당시 남북은 5가지 항의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기까지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남북은 2항인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의 문구 채택을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한국 측이 제시한 해당 항의 문구에 대해 북한이 굳이 ‘자유로운’이라는 표현을 ‘방문’과 ‘상봉’ 단어 앞에 두 번 다 명시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박한 겁니다.
당시 북한 대표는 “‘자유로운’이라는 표현은 문법상 방문에만 있을 뿐 아니라 상봉에도 붙는데, 꼭 ‘상봉’ 앞에도 ‘자유로운’을 붙여야겠나”라고 지적하면서도 “우리는 한국 측의 요구를 고려해 제2항인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의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을 실현하는 문제’로 완전히 합의, 확정하기로 하자”고 한 발 물러섰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이 1972년 6월 5일 처음으로 논의할 의제에 대한 합의를 이룬 것”이라며 “당시 남북회담 결과는 현재까지도 남북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의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 통일부가 이번에 내놓은 남북회담 사료는 모두 1652페이지 분량으로 이 가운데 418페이지, 약 26%는 회담 전략 및 실무자 신상정보 노출 등의 우려로 ‘공란’ 처리된 상태로 공개됐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 통일부 당국자는 “유관기관과 협의, 예비심사 등을 통해 공개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있었다”며 “(공개 범위 등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견을 바탕으로 향후 추가 공개할 때 감안해 개선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자 목용재,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