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음식을 먹을 때 맛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삶을 표현할 때에도 맛을 표현할 수 있더라고요. ‘좌절의 맛’, 그리고 ‘성공의 맛’인데요. 특히 ‘성공의 맛’은 승승장구해서 이룬 것보다 좌절과 실패를 딛고 얻은 것이 더 달고 맛있지 않을까요? 오늘의 주인공 김명옥 씨가 그렇게 느낄 것 같은데요. 살면서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본 김명옥 씨. 김포를 떠나 익산에서 귀농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지난주에 나눠봤는데요. 오늘은 명옥 씨의 ‘성공의 맛’을 느낄 수 있을까요?
마순희: 물론이죠. 처음엔 익산에 와서도 되는 일이 없었던 명옥 씨였습니다. 하지만 탈북민들이 정착과정에서 접하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전문상담사가 있었습니다. 남한 전 지역에 다 있는데요. 익산에서 만난 상담사 송은하 씨의 끊임없는 용기와 격려 덕분에 취업의 문을 계속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송은하 상담사가 귀농을 조심스럽게 제안했고 함께 하나씩 준비해 나가게 됐는데요. 익산의 특산물이 포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포도농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그런데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건 쉽지 않잖아요. 두렵기도 하고요. 명옥 씨의 경우엔 계속된 취업 실패로 자신감마저 바닥난 상태라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은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포도농사를 시작하면서 좋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사람이 활기를 띠고 지내면 좋은 일이 생기는 걸까요? 일단 귀농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 지역의 귀농귀촌센터에 찾아가서 상담도 받고 전문 교육을 받으며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는데요. 그 무렵 명옥 씨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할 미더운 동반자를 만나게 된 겁니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는 명옥 씨를 지켜보던 정착도우미가 자신의 지인 중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한 남성을 소개해준 거죠. 바로 그분이 지금 명옥 씨의 남편이랍니다.
송은하 상담사의 조심스러운 권유로 시작한 귀농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됐으니 남한에 와서 명옥 씨가 맛본 최고의 성공의 맛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사실 명옥 씨는 한국에 정착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지인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그런 행복을 자신도 꿈꾸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후에는 그 무지개 꿈을 버리고 그냥 자식들 뒷바라지만 열심히 하면서 살 결심을 했던 거죠. 그런 마음으로 지내면서 포도농사를 준비했는데 포도농사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귀농생활을 더 빨리 시작하게 됐고 2015년, 남편과 함께 6000평 포도농사를 짓게 됐습니다.
김인선: 6천 평이면 어느 정도의 규모인거죠?
마순희: 3천 평이 1정보니까 6천 평은 2정보죠. 2016년에는 김명옥, 본인의 명의로 땅을 1200평의 토지를 사서 씨 없는 포도를 심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에야 전문 포도 농사꾼이 됐지만 포도농사의 길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 눈이 나오면 따주고 순이 나오면 묶어줘야 하고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하루라도 일손을 놓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씨 없는 포도 재배까지 하면서 더 바빠졌다고 하는데 말하는 중에 전문용어가 줄줄 나오는 명옥 씨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김인선: 김명옥 씨에 대한 이야기 중에 가장 기분 좋고 행복한 내용인 것 같아요.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가 지어지는데요. 함께 사는 가족은 더 하겠죠?
마순희: 맞습니다. 명옥 씨가 절망하고 힘들어하며 술로 세월을 보낼 때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식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겠죠. 자식들이 학교생활에 적응도 못하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기도 했고요. 하지만 명옥 씨가 마음을 다잡고 정착에 힘쓰고 행복한 가정까지 이루고 안정되어 가니까 자식들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게 됐고 학교공부도 곧잘 따라가더랍니다. 2016년, 제가 명옥 씨를 만나러 익산에 갔을 때에 큰 딸은 전북대학교 2학년 재학 중이었고 아들은 군산의 기계공업고등학교 1학년에서 반을 대표하는 실장으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말이면 집에 와서 부모님의 (포도)농사를 돕기도 해서 마을에서 모두 기특하다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나 싶어 얼마 전에 전화했더니 딸은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대학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하고요. 아들은 전북에서 20여 명 학생들을 선발해서 독일 방문을 하는데 거기에 뽑혀서 해외교육에 나갔다 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엄마를 닮아서 두 자녀 역시 똑 소리 나게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 거죠.
김인선: 아이들이 잘 성장하고 있다고 하니까 안심이 되는데요. 다만 남한 토박이와 결혼한 분들 중에 평생을 너무 다르게 살아와서 싸운다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마순희: 그래요, 맞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명옥 씨의 가족을 조금 우려했었다고 합니다. 사실 남남북녀의 만남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은 경우들도 있다 보니 명옥 씨가 이룬 가정을 기쁨 반 우려 반의 시선으로 바라봤었던 거죠. 그러나 두 사람은 남과 북의 문화적 차이나 가정생활에서의 서로 다른 점들을 끈끈한 사랑으로 극복해 나갔다고 합니다. 더욱이 남편의 부모님이 6.25때 북한에서 남쪽으로 오신 실향민 분들이라서 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쉬웠던 것 같다고 해요. 이뿐만 아니라 명옥 씨는 남편과 함께 포도농사를 지으면서도 마을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함께 동참하면서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명옥 씨를 고 마을 사람들은 평양댁이라고 부르면서 친 가족처럼 편하게 대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이렇게 계속 행복하고 기분 좋은 소식만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올 여름엔 폭염도 굉장했고 지난달엔 태풍에 폭우까지.. 명옥 씨의 포도농장은 괜찮았을까 염려돼요.
마순희: 저도 태풍 소식에 명옥 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행히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해요. 태풍과 폭염을 이겨낸 ‘씨 없는 포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요. 저도 명옥 씨가 지은 포도를 맛보고 싶어서 두 상자를 주문했답니다. 명옥 씨가 가장 기쁜 때에는 자신이 키운 포도를 맛있게 먹었다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을 때라고 하더군요. 조만간 제가 명옥 씨에게 포도가 맛있다는 전화를 할 것 같습니다.
김인선: 명옥 씨가 재배한 포도를 맛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김명옥 씨는 오죽하겠어요~ 자신의 땀과 노력이 깃든 포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을 것 같은데 판매 어떻게 하죠?
마순희: 처음 포도농사를 하면서는 농민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취급하는 농협공판장에 팔기도 하고 도로변에 천막을 치고 판매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금년부터 본격적으로 수확을 시작한 씨 없는 포도는 인기가 많아서 판매걱정은 거의 없다고 하던데요? 다가오는 추석을 앞둔 덕분인지 주문량이 많아서 바쁘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습니다.
요즘처럼 알알이 정성이 담긴 달콤한 포도를 출하할 때면 명옥 씨의 기쁨은 배로 커질 겁니다. 절망과 시련을 이겨내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서 포도농장의 대표로 거듭난 김명옥 씨의 정착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희망, 그리고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빌어 남한 전역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는 남북하나재단의 북한이탈주민 전문상담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김인선: 아이가 넘어졌을 때에도 손을 내밀어주는 한 사람, 혹은 일어설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아이는 일어설 수 있더라고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김명옥 씨가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주변의 사람들 덕분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명옥 씨가 다른 사람들, 특히 같은 탈북민들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데요. 저도 명옥 씨를 통해 ‘사람이 힘이다’를 배워봅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포도 농사꾼 김명옥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고요. 마순희 선생님과는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