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보다 최선을, ‘이쁜옷수선’ 김영미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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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이제 많이 서늘해 졌어요~ 서랍 속에 넣어놨던 긴 옷을 꺼내는 시기가 됐는데요. 저는 그새 몸이 또 났는지 맞는 옷이 몇 개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옷 수선 가게를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성공시대 주인공이 수선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시라면서요? 소개 받을 수 있을까요? (웃음)

마순희: 소개해 주기엔 너무 먼 곳에 계시네요... 경상북도 포항이라는 곳에서 옷 수선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미 씨가 오늘의 주인공이랍니다. 포항은 서울에서 차로 5시간 걸리는 곳입니다. 북쪽에 계신 우리 청취자들은 포항이라는 도시를 잘 모르실 텐데요. 사실 저도 이번에 처음, 영미 씨를 만나러 가느라 가봤습니다.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로 맑고 푸른 동해바다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인데요. 가끔 남한의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하늘로 향해 손을 펼친 모습의 동상을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김인선: 호미곶에 가셨군요! 저도 말로만 들어보고 가보진 못 했어요.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 새해에 남한 사람들이 해돋이 보러 가는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그런데 포항이라는 도시! 저도 못 가본 이 경북의 도시에 영미 씨는 어떻게 정착하게 됐을까요?

마순희: 네. 경상북도에는 포항이 제철소가 있는 큰 공업도시이지만 탈북민들은 잘 알지 못해요. 2016년 남북하나재단의 실태조사를 보면, 포항이 속한 경상북도에 사는 탈북민들이 전체 남한 정착 탈북자의 3.5% 라고 합니다. 영미 씨가 처음 포항에 내려갔을 때가 2006년이니까 12년 전인데요. 그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탈북민들이 처음 한국에 와서 하나원에서 거주지 신청을 할 때는 ‘평양’에 한이 맺혀서 거의 서울에 살겠다고 신청하는데요. 영미 씨의 경우엔 남편 때문에 포항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영미 씨의 남편이 북한에서 탄광기계공장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공업 도시 포항에 가면 일자리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타산했고 또 영미 씨의 고향도 바닷가 근처라 고향과 잇닿은 동해 바다의 공업도시! 포항에 정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인선: 그렇군요. 그래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이고 의지할 고향 사람도 별로 없어서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마순희: 그렇죠. 생각했던 것처럼 일자리는 많아서 남편은 비교적 쉽게 직장을 잡았고 아들도 학교에 입학해서 잘 적응했는데 문제는 영미 씨였다고 하네요. 영미 씨도 처음에는 버스회사에서 버스 청소도 하고 식당일도 했는데, 북한에선 철도안내원으로 힘든 일을 해보지 않았던 영미 씨에겐 그 일이 힘에 부쳤나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고 해요.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억지로 참았다가 큰일을 겪은 거죠. 그때 영미 씨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는데 그저 참고 견디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에야 자신의 병이 간단치 않다는 걸 알게 돼 치료를 받았답니다.

김인선: 우울증이란 항상 우울하고 무기력해지는 마음의 병이잖아요. 예전엔 남한에서도 잘 몰라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꼭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하는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사실 우리들 중에도 우울증을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에서는 살아남기가 어렵다보니 우울할 사이도 없었거든요. 저부터라도 아무리 기분이 가라앉고 힘들어도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때문에 억지로라도 힘을 내서 일하며 살았으니까요. 아마 영미 씨도 우울증이라는 병을 처음엔 몰랐을 겁니다. 그저 ‘내가 왜 이러나’ 하는 생각만 했겠죠.

영미 씨의 경우에는 친정어머니도, 동생도 남한에 벌써 나와 있었고 남편과 아들도 함께 왔는데도 고향 생각이 그렇게 간절 하더랍니다. 혼자 있을 때는 탈북민 단체의 홈페이지마다 들어가서 북한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고 해요. 그때마다 자신이 너무 편안해서 그런 거라고 채찍질하면서 일하러 나갔고 열심히 일하면 그런 마음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안 되더랍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임신을 하게 됐어요. 예쁜 딸을 낳았는데도 영미 씨의 우울증은 좋아지지 않았답니다. 산후 우울증까지 더해서 대인기피증까지 생겼고 점점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고 심해진 우울증이 산모들에게 오는 급격한 호르몬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에는 미처 몰랐었다고 해요.

김인선: 탈북과 정착, 거기에 임신, 출산과 육아까지. 이렇게 힘든 고비의 연속이었으니 영미 씨에겐 마음이 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한데요. 영미 씨는 우울증을 잘 극복 했을까요?

마순희: 네. 영미 씨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어떻게든지 극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병원치료를 열심히 받았고요. 그러던 중에 의사 선생님이 자신이 하고 싶은 여가활동이나 취미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 하더래요. 처음엔 모두가 열심히 일하면서 정착하고 있는데 여가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궁리 끝에 취미로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일을 찾았답니다.

영미 씨는 어렸을 때부터 바느질에 소질이 있었답니다. 교복을 몸에 맞게 줄여 입기도 하고 기성복을 사다가 재단해서 자기생각대로 옷을 만들기도 했고요. 바로 그걸 영미 씨가 뒤늦게 기억해 낸 겁니다. 남편과 상의해서 6개월짜리 양장 학원에 등록하고 전문적으로 옷 수선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약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울증 증세가 사라져가더래요. 영미 씨는 학원을 졸업하고 1년 정도 노임을 받지 않고 옷 수선집에서 온갖 청소며 잔심부름을 해가며 열심히 수선일을 익혔고 그런 영미 씨를 남편이 전적으로 지원했답니다.

탈북민의 경우 정착지원금을 받게 되는데 그 중 거주지에 맨 처음 정착할 때 제공되는 ‘주거지원금’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역에 상관없이 1만5천 달러(1,700백만원)가 지원되는데요. 처음 주택에 들어갈 때 계약금, 보증금 등으로 (일부) 지원되고 5년 후 나머지 잔액을 탈북민이 직접 받을 수 있습니다. 초기 비용의 차이에 따라 잔액이 달라지는데요. 서울, 경기 지방보다 지방의 집값이 좀 더 저렴하잖아요. 포항에 정착한 영미 씨네는 나머지 잔액이 아마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았을 수 있습니다. 액수를 떠나서 남편이 그 돈을 영미 씨에게 전부 주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이쁜옷수선집‘이라는 자그마한 가게를 내오게 됐던 거죠.

김인선: 영미 씨의 남편은 든든한 지원군이었네요. 서로가 살뜰하게 보살피며 잘 사시는 것 같아서 듣기만해도 행복한데요. 젊어서도 두 분이 굉장히 애틋한 사랑을 했다고요?

마순희: 네. 영미 씨는 처녀 시절에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던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답니다. 워낙 사람이 성실하고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다며 영미 씨 친척들이 결혼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대요. 영미 씨도 자상한 남편에게 마음이 끌려 결혼을 하게 됐고요. 결혼해서 아들 낳고 잘 살았는데 고난의 행군 이후 먹고 살기 힘들어졌대요. 그래서 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때 아들을 군용 배낭에 넣어 영미 씨 남편이 짊어지고 강을 건넜다는데요. 소리를 내면 군대 아저씨들이 와서 잡아간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강을 건넜는데 다 건너고 보니 아들의 온 몸이 물에 젖어있더래요. 그렇게 얼음장 같은 찬 물에 젖으면서도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준 아들이 너무 기특하고 안쓰러워서 부부가 아들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당시 두 분의 심정이 어땠을지... 저도 가슴이 아프네요. 그 군용 배낭에 넣어온 다섯 살 아들이 이제 19살이 됐겠네요. 이제 정착 13년차! 옷수선 집 사장으로 재밌게, 열심히 살고 있는 영미 씨의 못 다한 얘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갑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