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북한에서 안내원을 하던 김영미 씨.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운명의 상대,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다는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게 되고 1998년 고난의 행군 이후 두만강을 건너게 됩니다. 당시 다섯 살이던 아들을 등에 지는 군용 가방에 넣어서 말이죠. 얼음장 강은 강물에 젖으면서도 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아들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고 남한까지 오게 됐습니다. 이 아이가 지금 19살이라는데요. 그러면 고등학생이겠네요?
마순희: 네,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영미 씨의 아들은 아빠를 닮아서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배우같이 잘 생겼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영미 씨를 만나러 남북하나재단 직원분이랑 집에 찾아 갔을 때 인터뷰하는데 지장이 될까봐 가방을 메고 조용히 도서관으로 공부하려 나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우리들보고도 일 잘 보고 가시라고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2년 사이 많은 일이 있었더군요. 얼마 전에 있었던 태풍 소식에 전화로 안부를 물었는데 태풍 피해는 없었지만 그 착한 아들이 요즘 엄마 속을 좀 썩였다고 하네요. 아들아이가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데 대학 말고 미용전문학교에 가겠다고 해서 몇 달을 아들과 다퉜답니다. 아들의 고집이 쉽게 꺾이지 않아서 남편에게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두 시간도 안 돼서 오히려 남편이 설득당했대요. 무작정 반대만 하지 말고 아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지켜봐 주자고 하더랍니다.
김인선: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자식이 좀 더 편하고 좋은 길을 걸었으면 하고 바라죠. 안정적인 일터에서요. 영미 씨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사실 북한에서는 남자 미용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한국에 와서 간혹 남자 미용사를 보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자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는 것이 더 편하거든요. 그런데 남도 아닌 자기 아들이 미용사가 되겠다니 처음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막무가내로 반대하다가 정 안되어 남편에게 부탁했는데 남편도 이제 아들 편이니 다른 수가 없겠죠? 그래서 영미 씨 아들은 지난 3월부터 인천에 있는 미용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김인선: 영미 씨의 마음은 십분 이해되지만 솔직히 요즘은 기술 가진 전문직이 더 인정받는 세상이잖아요? 게다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죠.
마순희: 네. 영미 씨 아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기가 할 일을 찾지 못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요.
김인선: 아버지가 설득당하실만 합니다!
마순희: 또 얼마 전에는 손톱을 관리해주는 네일아트 자격시험을 보는데 남학생은 자신이 혼자였다고, 인기 최고였다고 자랑하더래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영미 씨도, 이제는 미용일을 하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김인선: 영미 씨, 영락없이 우리네 주변에 있는 평범한 엄마의 모습인데요. 수선집 사장님으로의 영미 씨 이야기도 궁금해요. 옷 뜯어진 곳을 꿰매고 작거나 큰 옷을 수선해주는 곳이 옷 수선집이잖아요? 북한에도 이런 곳이 있나요?
마순희: 북한에는 마을마다 양복점이 있기는 한데 돈 주고 옷 수선을 맡기진 않아요. 집집마다 재봉틀이 있어서 간단한 건 가정들에서 직접 하죠. 한국에 와서 옷 수선집이 있어서 저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새 옷도 넘쳐나는데 옷을 수선해 입는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갔고요. 그런데 살면서 보니까 유행이라는 게 계속 변하잖아요? 바지만 해도 가랑이가 넓은 옷을 선호하다가 어느 해부터는 다리에 붙는 바지가 추세가 되고요. 유행이 지났다고 돈 들여 샀던 옷을 버릴 수 없으니 고쳐들 입고... 그래서 이런 옷 수선집이 인기가 많다는 걸 저도 알게 됐습니다.
김인선: 그래서 수선집 손님들 중엔 복잡한 주문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수선을 해서 영 다른 모양의 새 옷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인데요. 영미 씨도 초기엔 남한식 표현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 같고 손님들의 요구 사항은 복잡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힘든 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잘 보셨어요. 그런 부분이 제일 힘들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TV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탈북민들에 대해 많이 소개하니까 그나마 잘 알지만 2006년 영미 씨가 처음 포항에 정착했을 때는 탈북민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옷 수선 집을 열었을 때는 영미 씨가 서툴기도 했겠지만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큰 소리로 욕을 하는 손님들도 있었답니다. 왜 욕을 하느냐 항의하면 오히려 북한에서는 이런 말을 욕이라고 하는가며 따져서 더 속상하기도 했고요. 가게 문을 닫고 펑펑 혼자 울기도 하고 그랬답니다. 그러다가 내가 어떻게 가게를 냈는데, 지금 주저앉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다시 힘을 내고 했답니다.
김인선: 남북이 말투나 표현의 차이가 생각보다 커요.
마순희: 네. 손님의 주문사항을 영미 씨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또 반대로 손님들도 영미 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겠죠. 나중에야 그 차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됐고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영미 씨를 못미더워 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가게의 단골손님이 됐답니다. 어느덧 영미 씨가 가게를 연지도 7년이 됐는데요. 그 사이 단골손님들은 많아졌고 가게 수입도 안정적으로 잡혀가고 있습니다. 저와 전화 통화하면서 이렇게 철이 바뀔 때면 일감이 많아져서 바쁘다고 하는데 그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딱히 수선할 일이 없어도 지나가다 들러 커피 한 잔 마시며 수다 떨다 가는 손님이자 친구들이 많아진 것이 수입이 늘어난 것보다 영미 씨에겐 더 기쁜 일이랍니다. 또 새로 포항에 정착하는 탈북민 후배들의 고충을 상담해주고 정보도 알려주면서 영미 씨의 ‘이쁜옷수선집’은 탈북민들의 마실방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남한에서는 그런 집들을 동네 사랑방이라고 불러요. 남북 상관없이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수다 떠는 사랑방.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데요. 사실 탈북민들을 만나보면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친구가 많은 사람 같더라고요. 영미 씨가 딱 그런 사람 같은데요?
마순희: 네. 영미 씨가 항상 수선집을 지키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해주니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이겠죠? 큰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과 두 자녀 등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자신의 기술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하고 그것이 삶의 기쁨이라고 하는 영미 씨였습니다. 영미 씨가 이렇게 잘 정착을 한 데에는 숨은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어린 손녀도 봐주시고 가게의 크고 작은 일들을 묵묵히 도와주시는 미영 씨의 친정어머니인데요. 딸이 힘들어 할 때마다 말없이 도와주시는 친정어머니는 영미 씨의 마음의 안식처이자 든든한 후원자라고 합니다. 영미 씨는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이던데요. 우울증에 대인기피증까지 겪으며 힘들었던 시기를 잘 극복한 영미 씨에게 이제는 좋은 날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미 씨는 딱 한 가지 욕심을 부린다면 북쪽에 남아있는 남편의 아들을 데려오고 싶다고 해요. 간절히 꿈꾸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멀지 않은 앞날에 영미 씨의, 아니 영미 씨네 온 가족의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질 날이 오리라고 저도 믿고 싶고 함께 기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게를 좀 더 넓히고 싶대요. 본인이 일하는 데는 좁지 않지만 사람들이 와서 수다 떨기엔 좀 좁다는 거죠. 다들 편하게 들러서 차도 한잔하고 사는 얘기도 터놓는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 싶답니다. 영미 씨의 좌우명이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자’ 이거 거든요.
김인선: 우리가 최고는 되기 힘들더라고 최선은 다할 순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우리 함께 달려보죠.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사랑도, 일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쁜옷수선집’ 사장, 김영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