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요즘 남한 전역에 걸쳐 축제가 많이 열리고 있어요. 부산 자갈치축제, 안면도 대하축제, 금산 인삼축제 같은 먹거리 축제부터 순천만 갈대축제, 지역별 억새축제 같은 단풍축제까지요.
마순희: 그렇더라고요. 서울에서도 하늘공원 억새축제가 있고요. 여의도 정원박람회가 있었잖아요. 또 우리 탈북민들을 위한 어울림한마당 축제도 있을 만큼 남쪽의 가을은 축제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특히 매년 10월에 진행되는 ‘한마음 체육대회’는 북한이탈주민들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하는 어울림한마당이라는 축제입니다. 다양한 체험마당과 놀이마당도 있어서 많이들 참여하는 행사죠. 정말 대한민국에서는 계절마다 지방마다 특색에 맞는 축제들이 참 많더라고요. 오늘의 주인공도 역시 다가올 축제로 많이 분주한 분입니다.
김인선: 어떤 축제죠?
마순희: 다가오는 10월 18일에 수원에서 벌꿀축제 행사가 열리는데요. 벌꿀축제는 전국의 양봉인이 해마다 모여 농가들의 화합도 도모하고 직접 생산한 꿀을 시민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하는 큰 행사라고 합니다. 여기에 오늘의 주인공도 참가한다고 하는데요. 오늘 성공시대의 주인공은 경남 마산에서 꿀벌을 키우는 52살 이국화 씨입니다. 한국정착 7년차인 이국화 씨는 국화양봉원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딴 양봉원을 운영하는 대표님이기도 합니다. 양봉일을 시작한지 올해로 5년이 됐네요. 국화 씨는 이번 벌꿀축제에 남편과 함께 올라와서 양봉 기자재들도 알아보고 구경도 하고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김인선: 지금 ‘남편과 함께’ 라고 하셨는데 같은 탈북민이신가요?
마순희: 아닙니다. 남한 남자예요. 이국화 씨는 큰 양봉업체의 대표일 뿐 아니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소문난 남남북녀 한 쌍인 거죠. 국화 씨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요금받는 일을 했는데, 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만 하면서 지냈답니다.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고 또 일하는 정신에 외롭다는 생각도 들 짬이 없는 것이 더 좋았다고 해요. 그렇게 일만 하던 국화 씨는 탈북민의 초기 정착기관인 하나원을 같이 나온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소식을 전할 때마다 나도 일만 하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딱히 아는 사람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주선해주는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됐답니다. 큰 기대 없이 등록을 했는데 그곳을 통해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된 거죠. 첫 인상에도 건강하고 자상해 보였는데 몇 번 만나보니 성실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김인선: 네. 그런데 고속도로 요금소 직원으로 일하던 국화 씨가 어떻게 양봉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마순희: 아주 우연하게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시댁 일가 중에 양봉을 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꿀을 따는 시기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남편이 일을 도와주러 갔었답니다. 한국은 아무리 친척 사이에라도 일을 도와주면 반드시 품삯을 주잖아요? 국화 씨 남편이 품삯으로 꿀을 받을까 아니면 돈을 받을까 하고 국화 씨보고 물어보더래요. 국화 씨는 차라리 벌통으로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대요. 자신의 손으로 키워서 진짜 꿀을 먹어보고 싶었던 거죠. 국화 씨 남편이 품삯으로 받아 온 벌통은 모두 10통이었답니다. 그저 진짜 꿀을 한 번 맛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양봉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 마침 양봉 전문가인 시동생이 매일이다시피 찾아와서 양봉기술을 전수해주어서 그나마 큰 힘 들이지 않고 양봉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김인선: 그런데 저는 ‘벌’ 한 마리만 보여도 혹시라도 쏘일까 봐 무섭던데, 국화 씨는 무섭지도 않았나 봐요.
마순희: 무서운 게 아니라 꿀벌이 처음부터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이는 것이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국화 씨에게는 양봉이 천직이었나 봐요. 중장비 사업을 하는 남편도 시간이 나면 국화 씨의 일손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양봉은 국화 씨 몫이었답니다. 국화 씨는 양봉관련 기술서적을 구입해서 밤새워 읽기도 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일일이 적어놓았다가 시동생이 오는 날이면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질문세례를 안기기도 했다면서 자신이 양봉업을 하기까지 시동생의 도움이 컸다고 하더군요.
처음 결혼을 결심할 때 국화 씨의 마음은 이제는 나에게도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생겼다는 느낌이었답니다. 경상도 태생인 남편은 비록 무뚝뚝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국화 씨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기에 큰 걱정은 안 했지만 시댁 식구들과 어떻게 친해질지 걱정도 되었답니다. 그런데 첫 날 남편과 함께 인사 드리러 갔을 때 시어머님이 말 그대로 버선발로 뛰어 나오셔서 두 손을 꼭 잡아 주실 때 저도 모르게 ‘이게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이제는 내 집 식구로 함께 살아가자 하시며 감싸 안아 주실 때에는 고향의 친정어머니 같은 생각이 들어 국화 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김인선: 제 경험상으로 시댁 식구들과 가까워진다는 게 참 어렵거든요. 그런데 국화 씨는 전혀 안 그런 것 같아요.
마순희: 어떻게 어려움이 전혀 없을 수 있겠어요? 행복할 것만 같은 국화 씨네 가족에게도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은 역시 있었답니다. 특히 작년에 남편의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되었답니다. 그때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시어머님과 또 시댁 식구들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국화 씨도 남한에 와서 처음 자식을 결혼시키려니 모르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서 인터넷으로도 알아보고 지인들의 조언도 들으면서 나름대로 결혼식을 준비했던 거죠. 국화 씨는 결혼 당사자인 아들의 말을 우선적으로 들어보고 본인의 요구대로 해주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어머님과 시누이 등 시댁 어르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에서 와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법도를 무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들 하는 것처럼 시댁에선 예물을 많이 주고, 받을 것도 많이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당사자인 아들 본인도 그렇고 국화 씨의 생각에도 예단이나 예물 같은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곳에 돈을 쓰기보다는 결혼 후 필요한 곳에 돈을 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물이나 예단보다는 새로 시작하는 살림집의 가전제품이나 가구들을 좋은 것으로 장만해주려고 했던 것이 시댁의 노여움을 산 것이었습니다. 국화 씨는 갈등이 생겼으면 그것을 서로 대화하여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편과 함께 시댁을 찾아갔대요. 그리고 내가 북한에서 와서 몰라서가 아니라 옛날 방법도 좋지만 지금 당사자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고 지금의 방법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해드리고 결국 오해를 풀게 되었답니다.
김인선: 사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물, 예단을 형식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많이들 생략하거든요.
마순희: 맞아요. 지금은 북한에서 왔다지만 한국 사람보다 더 똑소리 나는 며느리라고 동네에 자랑을 하실 정도로 시어머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가정이나 사회나 소통이 안 되면 서로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남남북녀로 이루어진 가정이 특히 그런데요. 부부 사이에, 혹은 시댁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터놓고 대화하면서 갈등을 풀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점들이 쉽게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국화 씨처럼 지혜롭게 대처해 나간다면 능히 극복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인선: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잖아요. 국화 씨의 행복엔 보이지 않는 그녀만의 노력이 있었네요. 가정에서의 노력뿐 아니라 양봉일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국화 씨의 못 다한 ‘꿀맛 인생이야기, 그리고 꿀맛 사랑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마순희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