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선생님과 올 초부터 성공시대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어느새 10월이고 올해도 얼마 남지도 않았어요. 뭔가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마순희: 네, 저도 공감입니다. 겨울과 봄, 여름을 지나 어느새 가을, 단풍이 붉게 타는 10월이 되었네요. 시간이 참 빨리도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지만 대한민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는 수많은 탈북민들의 이야기들을 청취자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제대로 전달하고 자랑할 수 있어서 저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도 ‘속도전’이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한국에서의 생활 역시 모든 것이 ‘빨리빨리’에 습관된 우리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해 드릴 김정호 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느려도 괜찮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정호 씨는 올해로 한국정착 16년이 지난, 저보다도 하나원 선배님이신데요. 2002년, 5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대한민국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노점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어학원 통학버스의 차량기사로, 지금은 그 학원의 차량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쉬지 않고 한 길을 꾸준히 가고 있다는 김정호 씨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김인선: 오늘의 주인공 김정호 씨. 거북이처럼 쉬지 않고 꾸준히, 천천히 가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어도 순간순간 조급해질 때도 많던데 정호 씨는 어떻게 한결같이 ‘거북이처럼’이 가능할까요?
마순희: 네, 뼈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김정호 씨 역시 많은 탈북민들처럼 고난의 행군 시기에 돈을 좀 벌어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두만강을 건넜다는데요. 말도 모르는 중국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힘든 육체노동뿐이었지만 그나마 매달 꼬박꼬박 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습니다. 중국의 벽돌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지내다보니 대한민국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행을 시도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북경 지역에 가서 중국공안에 잡혀 북한으로 북송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1년 넘는 강제노동으로 거의 반죽음이 되어 나오게 되었답니다. 가족들의 지극정성 보살핌으로 한 달이 넘어서자 겨우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2001년 처와 함께 두 번째로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2년 정도 살면서 돈을 벌어 한국으로 가려고 계획했었는데 뜻밖에 처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차나 버스 같은 운송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이미 체험했던 김정호 씨는 임신 5개월 된 아내와 함께 도보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미얀마 국경까지 걸어서 가게 되었습니다. 가다가 여비가 떨어지면 일하여 돈을 벌고는 또 길을 가고, 지도 한 장을 들고 가는 길이 1년 2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김인선: 저는 평소보다 조금만 더 걸어도 힘들던데 1년 2개월 동안 걸어서 한국 땅을 밟았다는 김정호 씨의 이야기에 왠지 부끄럽네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시작한 한국생활이지만 그것도 처음엔 만만치가 않다고들 하잖아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하나원 시절에 김정호 씨는 112명 명 교육생들을 책임지는 총무로 활동하게 되었는데요.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던 2002년 7월 2일을 김정호 씨는 영원히 잊지 못 한다고 하더군요. 112명의 교육생들과 함께 하나원 정문을 나오면서 각오도 남달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 마라톤 경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112명의 선수들이 인생마라톤의 출발점에 서 있다, 5년 후나 10년 후 우리들의 모습이 과연 어떨지는 그때 가서 평가받게 되리라’ 하는 생각을 했대요. 김정호 씨는 이제 하나원을 나온 지 16년이 되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자신이 인생 마라톤에서 결코 뒤진 것 같지는 않다면서 느긋하게 미소를 짓더라고요.
김인선: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로운 사회에 정착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탈북민들에게 제공되는 정착지원금이나 정부보조금이 있다 해도 살아갈 길이 막막했을 텐데, 김정호 씨는 고민 없이 바로 일을 시작했다고요?
마순희: 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니 걱정도 태산 같았지만 가장이었으니까요. 김정호 씨가 하나원 나와서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이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는 것이었답니다. 사실 북한에서 김정호 씨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인민군대에 입대했고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군 복무를 했답니다. 워낙 성실하다보니 물류창고 관리도 하면서 부대에 있는 운전기재들을 못 다루는 것이 없을 정도로 운전에 능숙했었답니다. 그러다보니 용어가 다르고 쉽지는 않았지만 운전 면허증 취득을 한 거죠. 면허증을 취득하고 하나원 퇴소 두 달 만에 1톤 트럭을 구입했고 노점장사를 시작했답니다.
김인선: 노점 장사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거라 한국이 낯선 김정호 씨에게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마순희: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김정호 씨는 군사복무시절에 여러 가지 운송기재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경험이 있었기에 운전에는 자신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지도 한 장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훈련 받았던지라 아무리 교통이 복잡한 서울이라도 교통정보가 담긴 지도 한 장이면 못 가는 곳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남한에서는 1997년부터 운전할 때 교통정보와 길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라는 게 있어서 어디든 쉽게 찾아갈 수 있었지만 가격이 비싸서 모든 차에 다 장착돼 있지는 않았는데요. 정호 씨의 트럭에도 네비게이션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의 도움이 없어도 김정호 씨는 자신은 길도 잘 찾고 한 번도 길을 헷갈린 적이 없었다며 자부하더라고요.
김인선: 보통 길을 잘 찾는 사람을 보고 ‘길눈이 밝다’라고 말하는데요. 김정호 씨가 그런 것 같아요. 북한의 제대군인이면 다들 그렇게 길눈이 밝은가요?
마순희: 대부분 그렇다고 봐야죠. 사실 북한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조건이지만 ‘명령은 무조건 끝까지 관철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하거든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웬만하면 만능이 되는 것 같아요. 김정호 씨의 경우에는 군사복무시기에 쌓은 기술과 사회생활 하는 동안 직업적인 사냥꾼으로 일하면서 쌓은 경험들이 축적되어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가는 것 등이 다 용이했던 것 같습니다.
김인선: 직업적인 사냥꾼이요?
마순희: 네. 사냥꾼이라고 하면 좀 낯설게 느껴지지만 80년대에 북한에서는 당에 보내는 선물로 갖가지 짐승을 잡아서 바치던 때가 있었거든요. 김정호 씨는 그때 집에서 사냥개를 기르고 있었고 절차가 까다롭긴 해도 사냥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어서 매일이다시피 산속에 사냥하러 다니곤 했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깊은 산속에서도 지도 한 장만 가지고 있으면 손쉽게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된 거죠. 한국에 와서도 지리와 교통정보는 생소했지만 북한에서 군사복무도 하고 사냥꾼으로 산속에서도 길을 찾던 그 능력을 발휘해서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인선: 김정호 씨의 경우 북쪽에서의 경험이 남쪽에서 일하는데 도움이 꽤 많았던 같은데요. 정호 씨는 계속 노점상을 했어도 충분히 잘 하셨을 것 같은데 지금은 또 어떻게 학원차량 운행을 담당하는 일을 하게 됐을까요?
마순희: 좀 더 안정적인 일을 찾게 된 거죠. 정호 씨는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1톤 트럭을 사서 노점상을 시작했는데요. 그렇게 4년을 노력하다보니 17평 임대아파트에서 28평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고 학원차량을 운전하려고 15인승 승합차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점상을 그만두고 좀 더 안정적인 학원차량 운전기사로 취직하려니 소개비로 한 달 급여를 요구하더래요. 그전 같으면 그 큰돈을 그냥 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겠지만 앞으로를 생각해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그 돈을 주고 일자리에 취직했고 그렇게 김정호 씨의 운전직 업무가 시작된 것입니다.
김인선: 네. 거북이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김정호 씨의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전해드릴게요. 마순희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