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한남자로, 임서룡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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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선생님, 오늘이 2018년도에 전하는 성공시대 마지막 주인공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이에요.

마순희: 그러네요. 어느새 금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라 어떤 분을 소개할까 생각하다가 임서룡 씨를 떠올렸습니다. 평범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서룡 씨는 변압기 제조회사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김인선: 사실 평범하게 산다는 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 어렵더라고요. 남들은 평탄하게 사는 것 같은데 왠지 내 삶은 우여곡절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요.

마순희: 네, 맞는 말씀입니다. 내 삶만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은 것처럼 생각되기가 쉽지만 알고 보면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거든요. 특히 우리 탈북민들의 경우 그 어느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우여곡절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탄한 삶이 거의 없다고 봅니다. 오늘의 주인공 임서룡 씨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서룡 씨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한 돌도 되기 전에 부모님과 함께 북한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중국으로 나오려고 하는 경우는 들어봤지만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서룡 씨 어머님이 한 돌도 안 된 서룡 씨를 데리고 다시 북쪽으로 간 이유가 있나요?

마순희: 북한에 살고 있는 외가 켠 친척들이 출세나 진급 등에서 중국 연고자라고 불이익을 받고 있다면서 조선에서 살기를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만 해도 중국에서 사람들이 건너오기도 하고 건너가기도 하면서 크게 단속을 하지 않았거든요. 제 친구들도 여럿이 중국에서 나와서 북한에서 살다가 생활이 어렵게 되면 다시 밤중에 도로 중국에 가기도 했었으니까요.

김인선: 서룡 씨가 커가면서 점차 중국으로 건너가기가 힘들어진 셈이네요. 하지만 서룡 씨의 경우 고향이기도 하니까 중국으로 다시 나가고 싶었을 것 같아요.

마순희: 중국으로 나가고 싶은 건 서룡 씨뿐만 아니라 북한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고요. 그리고 임서룡 씨는 갓난아기 때부터 북한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향을 함경도라고 알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서룡 씨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7년, 대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방학이 되면서 집에 온 서룡 씨는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온다고 친구들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김인선: 고난의 행군으로 고향을 떠난 탈북민들이 많긴 하죠. 서룡 씨의 경우 중국에 친척도 있었을 테고요.

마순희: 네. 하지만 아무리 중국에 친척들이 살고 있어도 서룡 씨는 놀고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중국의 식당에서도 일하고 국수공장, 건설현장에서도 열심히 일했다는데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살다 보니 같은 노동을 하고도 품삯을 적게 주거나 안 주는 경우들도 많았다고 해요. 탈북민들인 경우 중국에서는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이 살아가기가 더 힘든 경우가 많거든요. 여성들은 대부분 선택의 여지도 없이 중국의 남성들과 살게 되면서 그나마 한 가정에서 보호라도 받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남성들의 경우에는 일은 일대로 힘들게 하면서 로임을 제대로 받지 못 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간혹은 로임 줄 날짜가 되어도 돈을 안 주기가 일쑤라고도 합니다. 불이익을 못 참고 이의를 제기하기라도 하면 불법체류자라고 신고한다고 협박하기도 하고 또 실제로 고발을 당해서 북송되는 힘든 사례들도 참 많았습니다. 서룡 씨 역시 이런 불이익을 받았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먹게 되었답니다. 마침 중국에 있는 먼 친척집에 살고 있는 북한여성을 통해서 한국으로 가는 노정을 알게 되었고 2005년에 베트남, 태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오게 됐다고 해요.

김인선: 그렇게 어렵게 한국에 왔는데 남한에선 잘 지냈나요? 탈북민 중 여성의 비율이 워낙 많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탈북 남성들의 활동 영역이 좀 좁은 것 같기도 하거든요.

마순희: 네, 남성 비율이 적은 것은 맞습니다. 매년 남북하나재단에서 실시하는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여성들의 비율이 70%, 어떤 해에는 80% 이상으로 높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한국에 오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인기가 높아요. 게다가 북한은 남한보다 가부장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물론 성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안 좋은 측면도 있지만 북한 남성들 경우에는 자신과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기에 더 열심히 노력하는 면도 있어요. 임서룡 씨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탈북민 정착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다음날부터 일자리를 찾았는데요. 사실 그냥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고 해요. 벼룩시장이나 교차로라는 정보 신문을 보면 수많은 일자리가 있으니까요.

김인선: 벼룩시장이나 교차로는 구인구직, 부동산 등의 생활 정보가 실린 신문이죠. 무료로 볼 수 있고 길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살펴보긴 하더라고요.

마순희: 네. 그래서 탈북민들도 많이 이용하죠. 다만 일자리들이 단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용직인 경우가 많다는 게 좀 아쉽더라고요. 하지만 서룡 씨는 일용직이라도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반가웠고 웬만한 조건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일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일하는 것에 비해 로임이 너무 적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용지원센터에 찾아갔습니다. 고용지원센터의 담당자를 만나서 적성검사도 하고 상담도 받았답니다.

김인선: 고용지원센터는 개인과 기업이 원하는 일자리와 인재를 빠르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죠. 그래서 경력단절 여성들이나 노인들도 고용지원센터를 찾는데요. 모르는 분들도 많거든요.

마순희: 네, 우리 탈북민들은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거나 또 나와서 지역별로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하나센터에서 교육을 받아서 고용지원센터에 대해 알고는 있답니다. 하지만 처음 일자리를 잡을 때에는 탈북민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배들이나 하나센터, 그리고 전문 상담사 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취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용지원센터 직원은 북한에서부터 기계관련 일을 해왔고 대학공부까지 했었던 서룡 씨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준 것입니다. 고용지원센터를 통해서 서룡 씨가 소개받은 곳은 변압기를 제조하는 회사였는데 그때부터 서룡 씨는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그 회사에서 기능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10년 근무하는 모범사원들에게 시상하는 황금메달을 받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김인선: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직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회사에서 장기 근속자에게 황금 메달을 주는 거죠.

마순희: 맞습니다. 장기 근속을 하기까지 서룡 씨에게도 어려운 점은 있었습니다. 변압기 제조 회사다보니 용어도 설비도 모두 영어로 된 것들이 많아서 그것을 외우고 익히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야 소통도 업무도 제대로 해 나갈 수 있었는데요. 서룡 씨는 그때 만일 힘들다고 버텨내지 못 했다면 오늘의 자기도 없었을 거라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더군요. 자신이 이렇게 잘 정착해 나갈 수 있게 된 데에는 함께 봉사활동을 해 나가는 탈북선배들의 도움이 많았다면서 자신 역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이고 싶다며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김인선: 어떤 조언이 있을까요?

마순희: 탈북남성들 경우에는 다혈질이라 참지 못 하는 성격들도 있는데요. 그런 점을 잘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초심을 잃지 말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함께 성공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임서룡 씨,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가 되는 서룡 씨의 앞날을 함께 축복합니다.

김인선: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것. 누구나 하는 다짐이지만 누구나 쉽게 해내기는 어려운 일일 겁니다. 저도 그렇거든요. 그래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준 임서룡 씨의 삶은 어쩌면 그 누구의 삶보다 멋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쉬운 듯 쉽지 않은 평범한 남한 남자로 살아가는 임서룡 씨, 지금부터 10년 후에도 한결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