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든 나세진 씨(1)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보통 운동선수가 경기 중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계속되는 걸 슬럼프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운동선수 뿐 아니라 누구나 살다 보면 이런저런 슬럼프를 겪게 되는 것 같아요. 날이 추울 땐 봄이 되면 굉장히 의욕적으로 지낼 것 같았는데요. 봄이 됐는데도 생각만큼 의욕적으로 살고 있진 않거든요.

마순희: 흔들리고 낙담하는 건 누구나 똑같지 않을까요? 성공한 사람들은 어려움 없이 목표한 바를 척척 잘 해냈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더라고요. 제가 만나 본 많은 사람들 중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누구나 겪는 슬럼프, 그러니까 의욕 상실을 느낄 때에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도 흔들리고 낙담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을 잘 이겨냈는데요. 28살 나세진 씨입니다. 나세진 씨는 춘천에 있는 한 제약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랍니다.

김인선: 네. 지금까지 성공시대에서 만나본 주인공 중에 일단 가장 어리네요. 그리고 평범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성공시대 주인공으로 소개할 만큼 뭔가 특별한 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제가 나세진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세진 씨가 26살 때인 2년 전이었습니다. 한국의 여느 아가씨들과 다름없는 세련된 옷차림이며 유난히 맑은 목소리에 똑 부러지는 말투며 당당함이 첫눈에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보다 내면에 숨겨진 아름다운 효심이 세진 씨를 더 돋보이게 한다는 걸 잘 알게 됐는데요.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정든 직장을 포기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서까지 어머니 옆에서 효심을 다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김인선: 그럼요. 탈북청년 중에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먼저 탈북한 뒤에 뒤늦게 남한에 온 경우가 많잖아요. 떨어져 지낸 만큼 부모님과 잘 지내지 못하기도 하던데, 세진 씨는 엄마와 사이가 좋은가 봐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같은 경우에는 탈북과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서의 체류기간, 그리고 남한에 정착하면서 생긴 복잡한 가족관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례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부모자식 사이에도 헤어져 살았던 시간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나 원망 같은 것이 엇갈리면서 많은 문제들이 있으니까요. 세진 씨는 12살 때인 2004년에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돌아오겠다는 엄마의 손을 잡고 생각 없이 두만강을 건넜다는데요. 당시에는 탈북을 주도하는 브로커들이 많았는데 그 브로커의 요구대로 8개월 된 아기를 업고 두만강을 건너다보니 더 마음을 졸였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아기가 울지 않아서 무사히 두만강을 건넜고 모녀는 중국에서 살게 됐습니다. 조선족도 별로 없는 중국의 산동성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8년을 살다 보니 세진 씨는 중국말 밖에 모르게 되었던 거죠.

그러던 중 세진 씨 모녀와 알고 지내던 탈북여성이 한국에 가서 정착을 한 뒤에 연락을 해왔고 위험한 탈북 여정이 걱정됐던 세진 씨 어머니는 세진 씨보다 먼저 한국에 가게 됐습니다. 여러 나라를 경유하는 목숨을 건 모험을 해야 하는 위험한 길에 사랑하는 딸을 함께 데리고 떠나기 주저되었기 때문이죠. 다행히 세진 씨 어머니는 무사히 한국에 들어왔고 1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보다 안전한 방법으로 딸을 데려오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세진 씨는 여러 나라를 경유하는 위험한 길이 아닌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1년 만에 만난 모녀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어요? 하지만 한국에 정착하려면 좋다고 그냥 함께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세진 씨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의 정규학교에 들어 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김인선: 맞아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탈북 여성들이 자녀들과 떨어져서 지내더라고요.

마순희: 그렇죠. 세진 씨네 역시 어머니는 춘천에서 일을 하셨고 세진 씨는 안성에 있는 대안학교에 가게 됐는데요. 또래의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도 역시 말과 공부를 다 함께 배우는 처지였기에 서로 아는 것은 배워주고 모르는 것은 물어가면서 우정도 쌓고 공부도 하면서 한국생활 적응을 했다고 합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한 고비를 넘겼다는 성취감을 느꼈지만 세진 씨에게는 취업이라는 새로운 고비가 다가왔습니다. 사실 다른 학생들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취업준비를 위해서 여러 가지 교육도 병행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세진 씨는 말을 배워가면서 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고 합니다. 그런 세진 씨를 위해서 학교에서는 간호조무사 학원에 다닐 수 있게 해줬고 종합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할 수 있도록 취업도 알선해줬다고 합니다.

김인선: 쭉 들어보면 세진 씨는 한국에서 무난하게 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어떤가요?

마순희: 네,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세진 씨는 비교적 한국생활에 잘 적응한 편이지요. 하지만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국말을 배웠다고 해도 아직 한국말이 서툰 것이 문제였다고 해요. 졸업 후에 병원에서 일할 때에도 환자들은 세진 씨가 말을 하면 ‘윁남에서 왔어요? 중국에서 왔어요?’라고 물어보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마스크를 끼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러면 또 감기 걸렸냐고 염려하기도 했답니다. 자연히 말수가 적어지고 눈치를 보는 등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런 세진 씨에게 힘과 용기를 준 고마운 분이 계셨답니다.

세진 씨가 담당했던 한 여성 환자였는데요. 항상 세진 씨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던 그 환자분은 세진 씨가 북한에서 왔고 중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한국말이 서툴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이후부터 더 관심을 가지고 딸처럼 대해주었다고 하더군요.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감출 일도 아니라고, 당당하게 살라고 격려해 주면서 부러 말을 걸어주고 다른 환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답니다. 그 덕에 세진 씨는 한결 자신감을 가지고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었고 성실한 간호사라는 평가도 받았답니다. 당연히 세진 씨는 병원에 더 애착을 갖고 열심히 일했는데요. 또 다른 고비가 찾아와서 결국엔 병원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김인선: 많은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 부딪치게 되는 일 중 하나가 언어 문제죠. 세진 씨는 그 힘든 고비를 잘 넘긴 거 같은데, 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마순희: 세진 씨의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의 문제였습니다. 세진 씨도 어머니와 헤어져 있다 보니 그립기는 했지만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참고 견디면서 공부하고 취업을 한 건데 세진 씨 어머니는 ‘이때까지 그리 고생을 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도 갈라져서 살아야 되냐? 너는 엄마가 보고 싶지도 않느냐’고 자주 전화로 푸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갱년기 증세’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세진 씨는 어머니를 위해서 종합병원에서의 근무를 과감하게 접고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춘천으로 가게 되었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 같으면 자식이 속을 썩인다고 하는데 그 집은 오히려 어머니가 더 딸의 발목을 잡은 격이 된 겁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사춘기, 갱년기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는데요. 갱년기란 대개 40대 후반에서부터 50대 사이에 폐경 등과 함께 노화를 겪는 시기를 말하죠.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요. 저는 사실 갱년기가 언제 지났는지도 몰랐는데, 세진 씨의 어머니는 증상이 심하셨던가 봐요. 세진 씨는 세상에 엄마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는 거고 일자리를 옮겨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1년 반을 근무하던 정든 병원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하지만 춘천에 와서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일이 한참 재밌고 일하는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아졌을 때 회사를 그만두게 된 나세진 씨. 서울에서 잘 지내다가 오로지 엄마만을 생각해서 춘천으로 향한 나세진 씨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