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시구가 있는데요.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에는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온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면 그 사람의 일생이잖아요. 어떤 한 사람의 일생과 함께 마음까지 다 오는 거니까 사람이 온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인 것 같아요. 오로지 엄마를 위해서 자신이 닦아온 터전을 떠나 강원도 춘천으로 간 사람이 있습니다. 28살 나세진 씨인데요. 자신의 일생과 마음까지 담아 강원도에 있는 엄마에게로 간 그녀의 이야기,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나눠 볼게요.
마순희: 네. 12살 때 정든 고향을 떠나 8년을 중국에서 살다가 2011년에 한국땅을 밟은 나세진 씨인데요.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오다 보니 언어로 인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지만 정착 초반엔 언어문제로 몸 고생, 마음고생이 심했는데요. 세진 씨를 가장 힘들게 했던 언어. 바로 말 때문에 위안을 받고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늘 말투 때문에 위축되고 소외감을 느끼던 세진 씨는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김인선: 맞아요. 고등학교 졸업 후에 종합병원에 취직했는데 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얼굴 가리개인 마스크를 끼고 일했다고 했었잖아요.
마순희: 네. 그 모습을 보고 감기 걸렸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서 더 난감했었다는 세진 씨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환자분의 더 당당해지라는 격려의 한 마디가 세진 씨에게 큰 위안이 됐고 마음을 더 열면 사람들과 더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거죠. 환자들과도 잘 지내고 직원들과도 잘 지내면서 병원 근무를 한지 1년 반정도 됐을 때쯤 세진 씨 어머니가 함께 지내고 싶다고, 떨어져 지내지 말자고 하면서 딸에게 의지하고 싶은 모습을 엿보였다는데요. 당시 세진 씨는 일은 다시 구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나서 엄마가 있는 춘천으로 갔답니다.
김인선: 네. 하지만 생각처럼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면서요?
마순희: 네, 사실 아무 일이나 할 것 같으면 일자리는 어느 곳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대 초반이고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세진 씨였기에 공부를 좀 더 하고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세진 씨를 이끌어 준 사람은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탈북민 출신의 상담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상담사란 상담을 통해 상대방의 문제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상담으로 돈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죠. 심리상담사, 직업상담사,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심리상담사, 이혼전문상담사, 분양상담사 등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상담사들이 있습니다.
탈북민을 지원하는 공공기관인 남북하나재단에서도 전국적으로 100여 명의 북한이탈주민 전문상담사들이 탈북민들의 정착과정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직접 상담하고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춘천보건소에는 북한이탈주민의 정착과 건강을 위해 10여 년째 상담사로 근무하고 있는 선생이 있는데요. 지역에서 봉사단을 만들고 탈북민들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뛰고 있는 분이랍니다. 바로 그 사람이 세진 씨를 찾아왔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고용관련 업무를 지원하는 고용지원센터에 함께 가서 등록도 하고 컴퓨터 학원부터 다닐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거죠. 그러면서도 세진 씨는 틈나는 대로 봉사활동도 함께 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참 기특한데요. 그래도 현실을 생각하면 취업에 좀 더 매진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순희: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것도 배우는 것 못지않은 취업 준비더라고요. 봉사활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니 좋은 일자리도 연결될 수 있었으니까요. 춘천에는 ‘진달래 호반봉사단’이 있는데 그 봉사단의 회장이 세진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성실하고 똑 부러진 세진 씨를 보고 어디 가서도 제 몫은 착실히 할 것 같다는 믿음을 가졌던 겁니다. 인맥이 많은 분이다 보니 춘천에서는 좋은 직장이라고 소문난 제약회사에 세진 씨가 입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거죠. 사실 우리 탈북민들의 취업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전문취업기관보다는 지인을 통한 취업 건수가 훨씬 많거든요.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의 공채로 입사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힘든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김인선: 그래도 제약회사니까 병원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꽤 도움이 됐겠어요.
마순희: 아무래도 병원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회사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됐겠죠. 그러나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제약회사라 직원들 모두가 대학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고학력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세진 씨와는 대비가 안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위축되어 있을 세진 씨가 아니었습니다. 고학력자인 회사동료들을 보면서 자신도 회사에 어울리는 회사원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방송과 통신으로 고등교육을 실시하는 대학,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었기에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진 씨가 선택한 학과가 중어중문학과였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고요.
김인선: 세진 씨는 중국에서 지낸 시간 때문에 한국말을 못했고 그래서 남쪽에 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잖아요. 그런 세진 씨가 한국말이 익숙해진 지금, 다시 중국말을 배우고 학문을 익힌다고요?
마순희: 네. 세진 씨가 대학에서 다시 중어중문학과에 다니게 된 것은 제약회사의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세진 씨가 근무하는 회사가 세계적인 회사였는데 거래의 70-80%가 중국과의 무역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세진 씨가 8년간 중국에서 살면서 익힌 그 중국어가 커다란 장점이 되었던 거죠. 하지만 일상적인 생활용어보다 제약회사와 무역 업무에 맞는 기술적인 용어나 전문용어들을 구사할 수 있어야 했기에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해서 체계적으로 배우게 된 거랍니다.
김인선: 중국어가 한국생활을 어렵게 했던 걸림돌이었는데 이제는 디딤돌이 된 거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같은 회사 직원들 중 누구보다도 중국어에 능통하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가끔 회사에 중국 업체가 오게 되면 늘 통, 번역은 세진 씨 몫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봉사활동에 빠지지 않는다는데요. 한 번이라도 빠지면 허전하기 때문이랍니다. 회사업무, 대학공부 그리고 사회활동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 나세진 씨를 이웃들은 우리 똑순이, 우리 효녀 그러면서 친딸처럼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세진 씨를 만난 건 2년 전이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최근 다시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새 결혼도 하고 금년 1월에는 예쁜 공주님을 낳았더라고요. 지금은 육아휴직 기간이라 집에서 쉬고 있다면서 놀러 오라고 했는데 조만간 시간 내서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반가운 소식이 있었는데요. 세진 씨에게 힘들게 취직한 병원을 그만두게 만들었던 어머니도 몰라보게 변했답니다. 지금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춘천시에서 관리하는 요양시설기관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50대 중반의 나이지만 능히 좋은 기관에 전문가로 취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범사례로 된 겁니다. 저도 나세진 씨 모녀의 정착이야기를 통해서 누구나 노력하면 얼마든지 잘 정착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제가 요즘 의욕상실의 슬럼프를 겪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춘천의 똑순이, 나세진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갑자기 다시 활기를 찾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세진 씨를 통해 걸림돌이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슬럼프가 저만치 달아나는 것 같아요. 오늘도 성공시대를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멋진 주인공을 소개해 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네.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