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아닌 시행착오! 버스기사, 김희철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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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버스기사 김희철 씨에 대한 이야기 계속 나눠 볼게요. 올해 나이 59살 김희철 씨는 한국에 정착한지 이제 10년 되셨고요. 현재 전라남도에서 자신의 명의로 된 버스, 전세버스라고 하는데요. 그 버스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버스 운전 경력이 있었다고 했죠?

마순희: 네. 김희철 씨는 한국에 오기 전에 북한 외화벌이 기관인 능라총국에서 러시아 대표부로 파견한 무역일꾼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그가 한 업무가 소형 버스로 화물을 운반하는 것이었는데요. 여가 시간이 많은 편이다 보니 잠시 다른 일을 하게 됐습니다. 러시아에서 한국 교회가 멀어 교회로 가는 사람들이 불편해 하기에 이들을 태워다 주고 태워오는 일을 하게 된 것인데요. 한두 번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를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본부에 알려지게 되어 송환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김희철 씨는 무작정 몸을 피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교회를 다닌 것도 아니고 한두 번 설교를 들었을 뿐인데 그게 문제가 됐군요.

마순희: 네. 아시겠지만 북한에서는 일체 종교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평양에도 교회가 있고 또 불교 활동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 체제에서 종교에 대해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저에게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김희철 씨가 종교문제로 소환 위기에 처했을 때는 9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아마도 더 엄격하게 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김희철 씨의 도피의 삶이 시작됐는데요. 무려 1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도피하는 도중에 체포돼서 다시 러시아로 압송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서 다시 탈출해 당시 한국과 우호관계였던 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에 들어갔고 이를 계기로 2010년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10년간의 도피생활을 마치고 어렵게 들어온 한국인데.. 처음엔 너무 힘들더라고 말하는 탈북민들이 많잖아요. 한국에 오면 처음부터 무조건 잘 살게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말도 많이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르고, 낯선 것들 투성이였을 텐데 희철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네. 우리 탈북민들이 정착 초반, 한국생활을 힘겨워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0여 년의 도피생활로 나라 없는 설움이 어떤 것인지를 뼈에 사무치게 느꼈던 김희철 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고 다만 내가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주민등록증 하나만 있어도 어떤 활동이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게 행복하고 든든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은 어려움도 아니고 단지 낯선 땅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 나가는 시행착오 정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던 거죠. 굳이 어려운 점을 꼽으라면 처음 일자리를 찾는 것이 좀 어렵기는 했다고 말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서 처음엔 부업부터 시작했고 일하면서 자격증을 따는 데 집중했습니다. 중장비 자격증도 취득하고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대형면허와 택시기사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자격증이 생겨도 경력이 없어서 취업하기는 힘들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취업하기까지 노력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죠. 어떤 분야든 숙련된 사람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바심이 더 났을 것 같네요.

마순희: 맞아요. 더구나 희철 씨의 경우에는 자신을 품어준 고마운 대한민국에 절대로 짐이 될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일자리를 찾아 일을 시작했는데요. 경력도 기술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업 정도였지만 충분히 생활할 정도의 수입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기에 6시부터 9시까지 밤이면 학원에 가서 중장비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도 하고 운전면허, 대형 면허에도 도전했습니다. 타이어 제조 회사에서도 일하였는데 일도 힘들지만 고무 가루가 날려서 힘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다시 택시자격증을 따고 택시기사로 근무했는데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도 실제 하루 수입은 25-34달러(3-4만원)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식당에서 일해 보기도 했고 대형 면허가 있었기에 트럭 운전도 해 보았고 버스기사로도 근무했답니다.

이렇게 여러 직업들을 경험하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다는 자체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러면서 자신에게 맞는 직업은 역시 운전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안정적인 수입을 얻으려면 자신이 전세버스를 사서 학원 차량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운전 경력도 쌓을 겸 버스기사로 2년 정도 더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고 5년 차 되던 2014년에 드디어 자신의 명의로 버스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전세버스도 종류가 많잖아요. 8인용 소형버스부터 25인승, 35인승, 45인승까지요.

마순희: 김희철 씨의 버스는 25인승이었는데 3년을 몰았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금방 산 새 차 같았습니다. 먼지 한 톨 없는 의자며 커튼이며 알른알른한 창들까지 김희철 씨의 애정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거든요. 김희철 씨는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운전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새로 정착하는 탈북후배들을 보면 이런 얘기를 한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한 후에는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갖추어야 할지를 생각하고 하나하나 준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죠. 여러 가지 직업을 경험하다 보면 힘들기는 해도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자신감이 성공으로 가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입니다.

김인선: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 했는데 전세버스기사는 운전할 수 있을 때까지 쭉 가능한 일인가요?

마순희: 그럼요. 전세버스를 찾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정기적으로 학생들을 실어 나를 버스가 필요한 학원도 있고 여행사나 버스회사에서도 정기적으로 연락이 와서 안정적인 고수익을 보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단체관광을 가거나 여행을 조직할 때에도 너무 큰 대형버스보다 중형 버스를 더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여름 휴가철이면 쉴 사이가 없다고 하는데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운전을 하면서도 수입까지 높으니 일이 많아도 힘든 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탈북민들 중에도 버스기사로 10년 넘게 근무하는 분들도 계시고 화물트럭 운전으로 자기 사업을 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세버스를 사서 학원차량으로 운행하거나 하시는 분들의 수입이 가장 높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우선 버스기사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버스기사가 되는데 특별히 학력 제한은 없고요. 가장 먼저 1종 대형 자동차 운전면허를 소지해야 합니다. 버스 운전 자격증은 1종 대형운전면허 소지자로 운전경력이 1년 이상인 경우에 시험응시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버스운전자격시험은 필기시험으로 치러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버스 운전 자격을 취득하고 1년 이상의 운전 경력을 가지는 것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전세버스를 구입하는 것입니다. 경제적 여력이 안 되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버스기사로 취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김희철 씨처럼 4-5년간 열심히 일하면서 저축하여 자신의 자금으로 버스를 장만한다면 그 이상 더 바랄 수는 없는 거겠지요. 버스기사로 2년, 전세버스로 5년차 학원 차량을 운행하면서 오늘도 힘차게 달리고 계실 김희철 씨! 내가 노력하다 보면 나를 돕는 사람들도 있고 또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일도 중요하지만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신다는 소식을 빨리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인선: 하려던 일이 마음처럼 안 되면 실패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 힘들었는데요. ‘실패가 아니라 시행착오일 뿐이다’라는 김희철 씨의 말이 제 마음에 위안을 주네요. 여러분도 실패라고 느끼는 상황이 생긴다면 ‘시행착오일 뿐이야!’ 라고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