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코치 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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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탁구 코치 정서현 씨(가명) 입니다.

김인선: 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요즘 다가오는 평창올림픽 얘기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잖아요. 남북 단일팀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은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요, 1991년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현정화 선수와 이분희 선수가 한 팀으로 경기를 했던 날. 아마 북한에서도 기억할겁니다. 오늘의 주인공도 그 때 그 경기를 보고 탁구에 대한 꿈을 키웠다면서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당시 단일팀으로 출전한 남한의 현정화, 북한의 이분희 선수가 세계 최고의 탁구종주국이었던 중국을 꺾고 1등의 영광을 차지했었습니다. 두 선수가 함께 시상대에 올라서고 전 세계를 향해 울려 퍼졌던 그날의 아리랑은 남과 북 모든 국민들을 함께 울렸습니다. 그 중에는 탁구 꿈나무로 희망에 부풀던 12살 서현 씨도 있었던 겁니다. 소학교 시절부터 탁구채를 잡을 수 있었고 군에서도 손꼽히는 탁구 유망주였습니다. 남북단일팀의 경기를 보면서 서현 씨는 자신도 꼭 이분희 선수처럼 훌륭한 탁구선수가 되서 부모님을 평양에서 살게 해드리겠다는 야무진 꿈을 다시 한 번 새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1년 그 해에 열린 14세 이하 청소년 대회에 함경북도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평양에서 경기를 치르게 됐는데요, 비록 등수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탁구기술은 눈에 띄게 발전했고 2년 후에 열린 청소년대회에도 함경북도 대표선수로 또다시 평양으로 가게 됐는데요, 정작 전문선수단 선발의 기회는 좀처럼 차례지지 않았답니다.

김인선: 지역 대표로 선발됐을 정도로 탁구 실력은 좋았는데 선수단에 뽑히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면서요?

마순희: 네. 선수 선발하러 온 사람들이 능력은 좀 부족해도 뒷배가 있거나 돈 있는 집 자녀들을 선발해 갔기 때문에 서현 씨에게는 선발의 기회가 없었다고 합니다. 전문 국가선수가 되기 전에는 일체 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랍니다. 탁구공 하나를 몇 번씩 땜질해 가면서 연습해야 하는 서현 씨 같은 어려운 형편의 소녀에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어려운 고난의 행군시기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저세상으로 보내게 되었고 어머니마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10대 소녀인 서현 씨는 졸지에 남동생 두 명을 보살피며 소녀가장으로 주부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탁구를 잘 한다는 것은 생활에 아무 도움이 못 되었고 서현 씨는 자신이 탁구를 잘 친다는 사실 자체도 까맣게 잊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행방불명 됐었던 어머니가 돌아왔는데, 중국에서 몇 년을 살았던 까닭에 북한의 생활을 견디지 못 하고 다시 중국으로 갔답니다. 이후 서현 씨도 어머니를 찾아서 중국으로 들어가게 됐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네. 서현 씨는 탁구선수의 꿈도 잊은 채 살아오다가 한국으로 오게 됐다고 했는데, 한국에 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고요?

마순희: 네. 남들은 모두 진로를 생각해서 대학도 가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도 가고 자신의 진로를 위해 배움을 택했지만 서현 씨는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었습니다. 서현 씨에게는 참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기 때문인데요, 중국에 있을 때 막내 동생이 북한에서 보위부에 잡혀 감방생활을 했는데 도울 방법이 없어서 옥바라지를 못했고 결국 동생은 목숨을 잃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서현 씨가 한국에 올 때 중국에 계신 어머니가 잡혀서 북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막내 동생을 잃은 것이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져서 늘 가슴 아팠던 서현 씨였기에 어머니마저 그렇게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한 생각뿐이었답니다. 하나센터 교육을 마치자마자 취직한 회사생활에 눈코 뜰 사이가 없이 바빴지만 퇴근하면 다시 부업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북한에 보내 어머니의 옥바라지를 했고 끝내 어머니와 남동생을 남한까지 데려올 수 있었는데요, 한국에 온지 5년 동안 자신이 탁구를 칠 줄 안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겁니다.

김인선: 한국에는 일반인들도 오락으로 즐기고 있을 만큼 탁구장이 많습니다. 탁구를 좋아했던 서현 씨라면 관심이 갔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어느 날 퇴근길에 동료들과 함께 지나가다가 우연히 탁구장 간판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제야 아, 나도 탁구 칠 줄을 아는데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해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탁구에 대한 열망이 순간에 되살아난 듯 서현 씨의 발걸음은 저절로 탁구 연습실로 들어서고 있었다는데요, 탁구채를 잡고 몇 번 공을 날려 보았는데 25년 동안 잊고 살았던 탁구를 고맙게도 몸은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더랍니다. 그래서 신나게 한 시간 넘게 탁구를 쳤고 땀을 흘리고 개운한 마음으로 연습실을 나오면서 인사하는데 관장님이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만한 수준이면 비전문가들이 하는 아마추어 생활체육 대회에 나가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탁구는 어디서 배웠느냐, 탁구를 계속해볼 생각은 없냐면서 이것저것 묻기에 북한에서 왔고 어려서부터 탁구를 좀 했었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랬더니 서현 씨의 이야기를 들은 관장이 ‘한국에서는 생활체육으로 탁구를 많이 하는데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그 때부터 다시 탁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생활탁구를 즐기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지도자 역할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서현 씨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거죠.

김인선: 좋아했던 탁구를 다시 시작하게 됐지만 누군가를 지도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코치로 일하면서 탈북민이라 겪는 불편함은 없나요?

마순희: 네. 자세부터 기술까지 월등하다보니 누구하나 그를 무시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지도를 받으려는 교육생들이 늘면서 당당하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정규적인 탁구교육을 받았던 터라 모든 것을 취미로 시작하는 교육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된 거죠. 자신이 늘 남보다 뒤떨어진 것 같아서 항상 소심하기만 하던 서현 씨였지만 연습실에만 들어서면 사람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탁구장인데 북한의 국가선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연습하다보니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쑥쑥 늘어갔고, 그래서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면서 앞 다투어 서현 씨에게 수업 받기를 원했습니다. 지도자 생활 몇 개월 후 탁구구락부 대표님의 제안으로 아마추어 탁구대회에 나가게 됐다고 하는데요, 처음 나가는 대회라 너무 긴장해서 물잔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면서 웃음을 짓더라고요. 그 이후부터 크고 작은 대회들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거의 매번 상을 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서현 씨의 인기도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생활체육으로 탁구를 많이 하다 보니 탁구소조 같은 것도 있는데 그 중에 우리 양천에도 “코리안 드림팀”이라는 탁구소조가 있습니다. 거의가 자기 사업을 하거나 회사에 다니는 탈북민들이라 주말에 모여서 탁구 연습도 하고 경기도 하면서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고 정착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도 나누는 친목단체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탁구를 하며 그야말로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또 다른 꿈이 생겼다고요?

마순희: 네. 이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 해보았던 세계여행을 한 번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답니다.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 여유가 생기면 어머니를 모시고 유럽여행을 하고 싶은 것이 꿈이라면서 밝게 웃는 정서현 코치의 맑은 웃음 속에는 북한에서 탁구선수가 되어 부모님을 평양에서 살게 하고 싶었던 어린 소녀의 효심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죠. 오늘은 대한민국에서 탁구코치로, 선수로 비상한 정서현 씨의 정착사례를 통해서 다시 그 뜻을 새겨보게 됩니다.

김인선: 네! 앞으로도 정서현 씨의 더 멋진 성장을 위해 응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성공은 누구나 이룰 수 있지만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탈북민들의 성공과 그 기준에 대해 들어보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탁구코치 정서현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