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집’ 노인복지센터 대표, 오영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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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남한은 지난해 8월을 기점으로 전체 인구의 14%가 65세 이상인 고령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아무래도 노인산업이 많이 뜨고 있고 노인복지전문가라는 직업도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오늘의 주인공이 노인복지 전문가라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지금 남한에서는 100세 시대라는 표현과 함께 120세 시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더라고요.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또 의술도 발전하다 보니까 평균수명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노인인구가 늘어나게 되고 그에 따르는 전문적인 일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보통 노인복지사라고 하죠. 노인복지전문가 자격증을 가지고 노인복지시설이나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우리 탈북민들 중에도 사회복지사로, 특히 노인복지 업무에 관련된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련분야에서 근무하는 분들도 많으신데요. 오늘 이야기하려는 오영희 씨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영희 씨는 현재 순천에서 평화의 집이라는 노인복지 시설의 대표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탈북민 중에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분들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사회복지사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뭘까요?

마순희: 탈북자들에게 사회복지분야는 남한에 와서 처음 접하는 분야잖아요. 북한의 열악한 환경을 생각하면 제일 부럽고 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관심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사회복지를 공부할 때 북한에 두고 온 형제들과 친척, 지인들 생각을 하면서 시작했거든요. 고향에 돌아가서 노인복지시설을 만들고 싶고, 누구보다 수고하고 고생하신 인생 선배님들이잖아요. 그 어르신들이 여생이라도 편히 지내게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노인복지사, 노인심리상담사, 그리고 돌봄복지사와 요양보호사 공부를 다 했습니다. 다른 분들도 역시 두고 온 식구나 부모님들에 대한 못다한 사랑을 멀리서라도 실천하면서 죄스럽고 또 그립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영희 씨의 경우에도 1남 4녀 가정의 맏딸로 태어나서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다가 고난의 행군으로 어려울 때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간다고 동생과 함께 탈북했어요. 그러니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더 간절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사실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이 이론과 실습 등을 거친 후에 자격증을 따야 하는 전문직이라 되기가 쉽지 않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사회복지사는 대학에서 사회복지 이론에 대해 4년동안 공부하잖아요. 그리고 120시간의 현장실습을 마친 후에 받을 수 있는 자격증입니다. 사실 오영희 씨가 한국에 처음 나와서부터 노인복지분야에서 일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 한국에 나올 때에는 중국에서 갑자기 상황이 급박해졌기 때문에 젖먹이 어린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오다 보니까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엄청 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돈을 벌어서 가족을 데려오겠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쉬지 않고 일하는 것으로 온갖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고 쉬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했다는데요.

처음에는 장갑공장에서도 일하고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빈 시간에 두세 가지 부업을 병행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점차 살아가면서 이렇게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는 것보다 하나라도 배워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전문가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대요. 그래서 그때부터 부업하는 시간에 학원을 다니면서 컴퓨터 자격증도 따고, 운전면허증도 따고, 그 힘들다는 간호조무사 자격증도 다 일하면서 땄답니다. 그리고 고속도로 요금소 일을 하면서 대학공부도 했는데요. 대학등록금 지원도 받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자격증을 갖추다 보니 노인복지시설에 비교적 쉽게 취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감탄사만 계속 나오는데요. 일단 전문가가 되고 싶어서 복지사가 됐는데 영희 씨는 지금 복지관을 운영하는 대표가 됐습니다. 복지관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마순희: 여러 기관에서 복지사로 일하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시설을 꾸리고 운영해 보리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답니다. 처음 취직한 곳이 노인들을 보살피는 주간 보호시설이었는데요. 다양한 자격증 덕분에 취직은 쉽게 했지만 뜻밖의 어려움이 영희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에 영희 씨를 시샘하는 사람이 있었던 거죠. 북한에서 온 영희 씨가 자신보다 더 많은 자격증을 갖고있고 먼저 일하던 자신보다 신임도 더 받으며 일하고 있는 게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더래요. 그래서 그는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고 처음엔 사소한 일부터 트집을 잡더니 어떤 땐 잘 정리해 놓은 약들을 헝클어 놓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일까지 있었답니다.

김인선: 저 같으면 나가고 싶었을 것 같아요.

마순희: 그렇죠. 그런데 영희 씨는 그 모든 편견과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주간보호시설과 입소시설에서 요양보호사, 간호조무사로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한 곳에서만 일하면 실무까지 다 알아갈 수 없기에 처음에는 주간보호시설에서 일하다가 다음에는 입소해서 생활하는 주야간 시설에서 일했고 그후에는 사무장으로 6-7년 간을 성실히 근무하고 경험을 쌓아갔답니다. 영희 씨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인맥까지 탄탄히 갖춘 덕분에 2년 전 4월에 자신의 이름으로 어르신요양센터, 평화의 집을 열었답니다. 단층 건물이었기에 그리 크지는 않았습니다. 시설에는 모두 일곱 명의 직원이 함께하고 있었는데요. 영희 씨 동생도 사회복지사로 함께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영희 씨 동생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한국 분들이었습니다.

평화의 집에는 아홉 명의 어르신들이 계셨는데 그 중에서 몇 분은 오랜 기간 누워서 병을 치료하는 와상 환자였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에는 관찰 사진기(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요양원 내부를 손금 보듯 볼 수 있었는데요. 저녁 퇴근시간이라 당직 직원 외에 퇴근하기 전에 함께 앉아서 차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면서 그날 낮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담을 하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대표와 직원들 사이가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처음엔 그 자리가 업무 총화를 하는 자리처럼 보였는데요. 북한의 생활총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그날 업무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으면서 하루를 총화하고 있더라고요.

김인선: 아무래도 시설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의 상태에 대해서 직원들 모두 공유해야 하니까요.

마순희: 네. 그리고 시설 면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면 영희 씨가 운영하는 평화의 집이 주야간 보호센터로 시설이라는 겁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국민건강보험으로 노인요양시설에 입소해서 생활하시는 분들의 본인부담금을 최대한 줄여주고 있잖아요? 거의 80~90%를 국가부담으로 하고 있고 더욱이 수급자면 100%국가가 보장해 주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설이용자뿐만 아니라 영희 씨 입장에서도 보장금액이 잘되어 있어서 10여 명 정도만 수용해도 시설을 운영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북한에서 살다가 온 저희들이 봤을 때에는 너무 놀라운 현상이지요. 고령이 되면 거동이 불편하고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고들 하는데 무료건강검진, 치매검진, 또 진단을 받으면 치료와 증상에 따른 서비스들이 다 있는 거잖아요? 그 모든 서비스들이 다 되어 있는 것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영희 씨는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지금의 요양시설을 100인 수용시설로 확장시키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시설을 운영한 지도 3년차가 되겠군요. 그 동안 요양시설은 얼마나 성장했고 오영희 씨는 또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지 꼭 다시 가보고 싶네요.

김인선: 지금까지 사회복지사에서 시설의 대표가 된 오영희 씨의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그녀의 바람대로 100인을 한꺼번에 돌봐줄 수 있는 시설을 꼭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성공은 누구나 이룰 수 있지만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탈북민들의 성공과 그 기준에 대해 들어보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평화의 집 노인복지센터 대표, 오영희(가명)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