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보호사, 김지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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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제가 마 선생님을 소개할 때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라고 소개를 하는데요. 오늘의 주인공도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를 써도 될 만큼 탈북민들 사이에서 유명한 분이라고요?

마순희: 네. 사실 저에게는 국민엄마라는 호칭이 가당치 않을지 몰라도 오늘의 주인공인 김지혜(가명) 씨야 말로 제주도에서는 탈북 여성들의 친정엄마이자 언니로 불리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을 분입니다. 지금도 김지혜 씨는 제주에서 요양보호사로 또 장애인 활동보조인으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그녀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2010년으로, 나이가 50대 후반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지혜 씨는 하나원에서 나올 때 거주지를 제주도로 정했고 지금까지 8년을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요양보호사로 탈북민들의 친정엄마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답니다.

김인선: 김지혜 씨가 요양보호사라고 했는데요. 쉽게 말해 간병인,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평범한 요양보호사가 아니라면서요?

마순희: 맞습니다. 지혜 씨는 요양보호사기는 하지만 아주 특별한 요양보호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김지혜 씨는 북한에서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병원의 과장을 지낼 정도로 유명한 의료인이었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을 것 같던 김지혜 씨에게도 어려운 시기가 닥쳐왔는데요. 하늘같이 믿고 살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망한 사고가 발생한 겁니다. 그러나 자신만 바라보는 어린 두 자녀를 생각해서라도 언제까지나 슬픔에 쌓여 있을 수만은 없었고 남편 사망 후에도 살던 집에서 계속 살게 해주고 병원 일도 계속 할 수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살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남편 없이 두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는데요. 남편 사망 후 2년이 지날 때쯤 일반주택으로 이사하게 됐고 남편 덕을 보던 혜택이 다 끊기게 됐답니다. 그래도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여권을 뗄 수가 있었고 그걸 가지고 중국에 가게 됐습니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갖고 가서 장사도 할 생각으로 떠난 그 길이 사기꾼을 만나면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김지혜 씨는 난생 처음으로 어려운 생활을 겪게 됐는데요. 우연히 탈북민 여성을 알게 됐고 함께 브로커의 도움을 받으면서 대한민국에까지 오게 됐습니다.

제주도에 거주지를 잡은 후 하나센터 교육이 끝나는 날로 간병인 일을 시작했는데요. 워낙 의료인이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능숙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기억에 남는 일화도 많았는데요. 한 번은 장일루스 환자, 한국에서는 장 폐쇄증이라고 한다죠. 그 환자가 병원에 들어 왔는데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에게 여러 가지 검사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더래요. 자신이 간병인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린 김지혜 씨가 혼잣말처럼 ‘저 환자는 척 봐도 장일루스 환자 같은데 빨리 항생제라도 놓지 않고 왜 저러냐’고 했답니다. 물론 환자를 보고 있던 의사의 눈길이 간병인 아줌마가 뭔 참견이냐는 듯 곱지 않았대요. 그런데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후에 장일루스라는 진단이 내려진 거죠.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그 의사 선생이 김지혜 씨를 조용히 찾더랍니다. 간병인 아줌마가 어떻게 검사도 안했는데 환자의 병을 그렇게 잘 알아맞힐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거죠. 별수 없이 자신이 북한에서 왔고 유명 의대 병원 내과 과장이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게 되었답니다. 그 뒤로 그 의사는 시간이 나면 김지혜 씨와 자주 이야기도 나누면서 친분을 계속 이어나갔고 어느새 병원에는 꽤 능력 있는 간병인이 있다고, 그 사람이 북한 의사였다고 소문이 나버린 겁니다.

김인선: 한마디로 의학전문 지식이 있는 간병인이라는 말이네요. 그 사실이 알려졌다면 김지혜 씨를 찾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을 것 같아요.

마순희: 맞아요. 김지혜 씨 같은 경우에는 한 환자가 끝나기도 전에 예약을 하고 순번을 기다릴 정도로 쉴 짬이 없다고 합니다. 워낙 성실하고 부지런한 성격이기도 하고 의료인이 천직인 듯 어려운 환자들을 보면 자신을 돌아볼 새가 없이 정성을 다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의 보호자들이 너도 나도 그녀의 간병을 받고 싶어 하는 거죠.

김인선: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건, 물론 용어부터 체계까지 다 달라서 어렵긴 해도 한국에서 의사로 인정받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거거든요.

마순희: 그렇죠. 처음에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해보기는 했답니다. 그런데 의사가 되려면 북한에서의 의사 경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다시 의사 자격증을 받아야 하거든요. 이제 60고개를 바라보는 자기가 굳이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겠다고 공부만 할 생각은 없었답니다. 하루 빨리 적응해서 돈도 벌면서 환자를 돌볼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10여 일간의 하나센터교육이 끝난 다음날부터 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첫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의 오랜 의사 경력이 그녀의 간병인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혜 씨에게 간병 일을 맡기려고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요. 김지혜 씨는 처음부터 의사였던 내가 간병인 일을 하겠는가 하고 그 일을 꺼리었다면 오늘의 자기가 없었을 거라면서 밝게 웃었습니다.

김인선: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까 김지혜 씨가 요양보호사로서 일하기에도 무척이나 바쁜 것 같은데, 탈북 여성들에게 언제 그렇게 친정 엄마로 불리고 있을까 싶은데요?

마순희: 네.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서 김지혜 씨는 가장 어려울 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에 와서도 교회에 열심히 나가게 됐습니다. 지혜 씨가 다니는 교회에는 탈북민 성도들이 여러 명 있는데요. 함께 모여 정착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서로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탈북민들 사이의 크고 작은 일들과 경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 다 챙기게 됐다는데요. 바쁜 와중에도 탈북여성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장애인 활동보조인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연결하는 일도 했습니다. 지혜 씨 덕분에 벌써 4-5명이 장애인 활동보조로 근무하고 있었는데요. 앞으로 20여 명의 장애인 활동보조인을 양성할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결혼식은 물론이고 출산했을 때 미역국 끓여주는 일, 몸 조리, 아기 돌잔치까지 일일이 다 챙기고 아픈 사람들 병간호와 조언까지, 지혜 씨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답니다.

한편으로 지혜 씨를 보면 많은 일을 하니까 정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텐데요.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지혜 씨지만 얼마 전에는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도 갔었고 러시아와 유럽 등 외국에도 나가기도 하더라고요.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남편과 함께 한 달 정도 시간을 가지고 영국을 비롯한 10여 개의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답니다. 북한에 살았다면 외국 여행을 한달 씩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요. 김지혜 씨는 항상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오늘이 가장 행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고 노력한 만큼 인정을 받으면서 살고 있기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김지혜 씨입니다.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70이 넘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지혜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탈북민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우러러보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남쪽에서는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데요. 특히 지난 8일은 어버이 날이었습니다.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탈북민들에겐 유독 엄마, 아빠 생각이 더 간절했던 날이었을 텐데요. 같은 탈북민들에게 부모처럼 여겨지는 삶이야말로 성공한 삶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탈북민들의 성공과 그 기준에 대해 들어보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제주도에서 탈북민들의 친정 엄마로 불리는 요양보호사, 김지혜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