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박경화 씨(1)

사진은 서울 명동 인근 지하상가 한 옷 가게.
사진은 서울 명동 인근 지하상가 한 옷 가게.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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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2021년이 시작되고 처음 인사드립니다. 새해가 되면 각오나 다짐을 하게 되는데요. 새로운 각오로 시작하면 그 날, 그 시간부터 새롭게 태어나고 삶이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마순희: 네, 선생님과도 새해에 처음 만났으니 새해 인사를 하게 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인선: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이건 남한식이고, 북한식 인사는 새해를 축하합니다~ 아닌가요?

마순희: 맞습니다. 북한에서는 복을 받으라거나 운수대통하라거나 하는 것은 미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 받으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북한을 떠나 한국에 온 지 오래 된지라 어쩌면 지금은 한국식으로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말이 나왔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사가 길어지는 것 같지만 2021년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넘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라고,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들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올해엔 원하는 바 모두가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각오도 다짐도 새로이 했는데요. 아쉬운 점이 안 생기도록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우리 성공시대 주인공들처럼 말이죠.

김인선: 맞아요. 미래를 위해 오늘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성공시대에서 만날 수 있는데요. 2021년 첫 시작은 어떤 분일까요?

마순희: 네, 2021년 성공시대에서 소개할 첫 주인공은 바로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박경화 씨입니다. 올해 62살로 2007년에 한국에 입국한 분이세요.

김인선: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은 탈북여성들 중에 재봉일이나 옷 수선을 하는 분은 꽤 있더라고요. 하지만 옷가게를 운영하는 분은 개인적으로 처음 접하는데요. 옷가게를 하려면 유행에도 민감해야 하고 어떤 옷을 파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사장님들이 멋쟁이거든요. 박경화 씨도 굉장한 멋쟁이겠어요.

마순희: 잘 맞히셨는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박경화 씨는 굉장한 멋쟁이입니다. 제가 2015년도에 포항시의 한 시장에 자리 잡고 있는 경화 씨의 옷가게에 갔었는데요. 당시 경화 씨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우아한 머리모양부터 세련된 옷차림, 또 멋스럽게 꾸민 얼굴까지 그 모든 것이 조화된 한 마디로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가게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아기자기하게, 알뜰하게 꾸며져 있었고, 진열된 옷들과 가게의 구석구석에도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전시장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로 더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데요. 사실 제가 경화 씨를 알게 된 것은 그보다 몇 년 전에 국립의료원에서 근무할 때였거든요. 그때 경화 씨는 다친 팔을 수술 받느라 입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환자복 차림이었지만 머리칼 한 올이라도 흐트러질 세라 깔끔했는데요. 경화 씨가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멋쟁이로 변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답니다. 옷가게 사장님이라 그런지 옷차림도 더 남달라 보였는데요. 살집이 많지 않은 아가씨 같은 몸매라 40대처럼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김인선: 옷장사를 하려면 겉모습이 젊고 세련돼 보이는 것이 좋죠. 하지만 물건을 얼마나 잘 파느냐가 중요할 텐데, 아무래도 장사를 해 본 경험이 있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요?

마순희: 탈북민들 중엔 장사 경험이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편인데요. 경화 씨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먹고 살기 위해 시장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음식장사를 시작으로 공업품 장사까지 못 해 본 장사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밑천이 적었던 탓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이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들어가서 한두 달만 벌어오면 한 밑천 잡을 수 있다는 지인의 말에 경화 씨는 1998년에 두만강을 건넜는데요.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경화 씨는 중국에서 거의 10년을 목재가공 공장에서도 일했고 심양의 어느 한 식당에서도 일하면서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살았는데요. 우연히 만난 한 고향 지인의 소개로 2007년에 한국 땅을 밟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오는 도중에 팔을 다쳤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하고 탈북민들이 거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국립의료원에서 팔을 수술 받게 됐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다친 몸으로 일하려 하지 않고 처음엔 나라에서 주는 생계비를 받으며 살려고 했을 텐데 경화 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경화 씨는 탈북 여성들에게 잘 알려진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는데요. 밤에는 포항대학에서 사회복지학 공부를 하며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청소년상담사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김인선: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사회복지 공부를 하고 자격증까지 취득했다면 관련 분야에서 계속 일을 하겠다는 생각인 거잖아요.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됐을 테고요. 그런데 어떤 사연으로 요양보호사 일을 그만 두고 옷가게 사장님이 됐을까요?

마순희: 네. 저도 그 점이 참 궁금했습니다. 경화 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업무가 자신의 적성에도 맞는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참 안타까운 사정이 있었더라고요.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어르신 목욕을 시키다가 또 팔을 다쳤고 수술을 받게 되었던 겁니다. 한국에 오면서 다쳤던 팔이 왼쪽이었다면 이번엔 오른쪽 팔이었는데요. 두 번의 수술을 받다 보니 더는 힘쓰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경화 씨는 다른 일을 생각했고 최종적으로 옷가게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워낙 패션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비록 먹고 살기 위해서 한 것이기는 하지만 북한에서 공업품 장사를 해 본 경험도 있었기에 옷가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마음속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월급쟁이에서 자영업자가 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거든요. 더구나 전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금전적인 문제도 있고 좋은 가게를 찾는 일도 만만치 않으니까요. 남한 사람들 중에도 이런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경화 씨는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을 지 궁금하네요.

마순희: 남한에 와서 만난 남편의 도움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경화 씨가 처음 한국에 정착했을 때에는 서울 강서구에서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병원생활을 하며 홀로 외롭게 지내는 경화 씨의 모습을 보고 포항에 사는 고향 동생이 지금의 남편을 소개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가정을 꾸리게 됐고 경화 씨는 서울생활을 정리한 뒤 포항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였습니다. 포항에 와서도 바로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는데 일하면서 팔을 또 다쳤던 거죠.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은 요양보호사 일을 그만두고 쉬운 일을 찾아서 해보라고 했던 겁니다.

남편의 말에 경화 씨는 주저 없이 옷가게를 하고 싶다고 했고 남편은 가게를 낼 수 있는 돈을 보태줬습니다. 그렇게 경화 씨는 남편이 건넨 돈과 몇 년 동안 자신이 모았던 돈을 합쳐서 꿈에도 그리던 옷가게를 내게 됐다고 합니다. 경화 씨의 옷가게는 시장 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찾아갔던 날에도 이야기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드나들었고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수박이며 여러 과일을 직접 들고 오신 이웃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경화 씨네 옷가게의 단골손님이라고 했는데요. 경화 씨 역시 필요한 생필품이며 식품들을 그분들의 가게에서 단골로 구입한다고 하더라고요. 손님이면서 동시에 사장님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인 거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경화 씨도, 가게도 잘 정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김인선: 경화 씨도, 가게도 잘 정착하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참 많네요. 남편은 물론이고 시장의 이웃들까지 말이죠. 든든한 주변 분들 덕분에 경화 씨가 힘이 날 것 같은데요. 박경화 씨의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