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경상북도 포항에서 옷가게를 운영 중인 박경화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마순희: 네. 박경화 씨는 2007년 한국에 왔고 서울에서 요양보호사 일을 하면서 홀로 지내다가 고향 동생이 소개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포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경화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접하게 된 요양보호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포항에서도 요양원에 바로 취업했고 낮에 일하면서 밤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공부를 했습니다. 요양보호사를 평생 직업으로 생각했기에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청소년상담사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경화 씨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한국 입국할 때에도 팔을 다쳐서 수술을 받았는데 어르신 목욕 시키다가 다른 팔을 또 다쳤다고 했잖아요?
마순희: 네. 반대편 팔까지 수술을 받다 보니 새로운 일을 생각하게 됐고 평소 관심이 많았던 옷 장사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북한에서 공업품 장사를 해 본 경험도 있었기에 옷가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마음속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경화 씨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6년 동안 했던 요양보호사 일을 마무리 짓고 남편의 도움과 그동안 경화 씨가 모았던 돈을 합쳐서 시장 안에 있는 가게를 얻었습니다. 주로 일상복을 팔고 있었는데요. 덕분에 장을 보러 온 고객뿐 아니라 주변 상인들도 단골손님이 됐습니다. 경화 씨 역시 주변 상인들에게 물건을 사면서 상부상조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김인선: 남편도, 시장 상인들도 경화 씨의 남한 정착에 큰 도움이 됐겠네요. 그런데 아무리 사람들과 관계가 좋아도 손님에게 더 많은 물건을 팔려면 노력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유사업종에서 직원으로 일을 해보거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일하는 법을 배우는 거고요. 한 마디로 장사비법인데요. 경화 씨에겐 그런 비법이 있었을까요?
마순희: 네. 시댁 켠으로 옷가게를 하는 어르신이 계셔서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서울의 동대문시장은 남한 전역 뿐 아니라 중국, 동남아에서도 도매상들이 몰리는 곳으로 유명하잖아요. 경화 씨도 시댁 켠 어르신과 함께 동대문시장에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을 떼러 동행 할 수 있었습니다. 도매거래처 관리부터 단가 흥정까지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겁니다. 덕분에 비교적 순탄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경화 씨네 옷가게는 주변 상인들이 시기할 만큼 매출도 좋은 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서로 바쁘다 보니 휴대폰 문자로 인사만 서로 전하다 보니 구체적인 소식을 듣지 못 했었는데요. 코로나비루스가 길어지면서 의류업계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경화 씨 생각이 나더라고요.
상대적으로 고가인 겨울옷이 많이 팔려야 할 시기인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출도 자제하고 여행도 못 가니까 사람들이 옷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데 박경화 씨 가게 역시 여파가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안부를 물을 겸 전화를 했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옷가게를 접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요양보호사로 근무한다고 하더라고요. 팔을 다쳐서 수술을 받은 후 힘든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옷가게를 시작했는데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달에 3~4번은 서울에 가서 물건을 유행에 맞추어서 가져와야 하고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던 거죠.
김인선: 맞아요. 도매시장은 주로 밤시간부터 새벽까지 열리는데 서울과 포항을 오가는 일이 만만치 않죠. 배송도 되지만 직접 보고 재질을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마순희: 그렇더라고요. 차를 가져가면 야간운전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포항에서 서울까지 심야버스를 타면 무거운 물건을 들고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다쳤던 팔로 힘든 일을 안 하려고 선택한 옷가게인데 물건을 하러 오갈 때마다 무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힘들었을 텐데도 박경화 씨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부터 시작한 옷가게도 몇 년을 운영했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제가 경화 씨를 만나고 온 지가 벌써 5년 전이었습니다. 문자로 연락을 이어왔다고 하지만 긴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는데요. 이번에 성공시대 준비를 하면서 며칠 전에 다시 연락하게 됐습니다. 매출도 점점 떨어지고 경영이 어려워지고 있을 때 그전에 근무하던 요양원 원장님께서 다시 와서 일할 생각이 없는지 물어왔다고 하더군요. 수술 받았던 두 팔도 나았고 머리 아프게 가게를 운영하기보다 차라리 적성에 맞는 요양보호사 일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게를 접었다고 합니다. 박경화 씨는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합니다. 요양원 근무는 24시간 근무하고 48시간을 쉬다 보니 그 시간에는 다른 일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는데요. 어르신들의 집을 찾아가 돌봐 드리는 방문 요양도 할 수 있어서 수입도 괜찮고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해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매출에 대한 걱정 없이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만 하면 되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요. 하지만 옷가게 운영하는 일을 전적으로 지원했던 경화 씨의 남편은 왠지 섭섭했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화 씨의 남편이 오히려 경화 씨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하거든요. 경화 씨는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기에 저도 이번에 통화를 하면서 알게 됐는데요. 남편은 당뇨병이 심해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있었다고 해요. 몸이 아프니까 통증을 잊으려고 술을 가까이 하게 됐고 당뇨에 이은 합병증까지 더해져서 얼마 전엔 한쪽 눈 시력까지 잃었다고 합니다. 몸은 불편해도 심성이 착한 남편을 경화 씨는 나 몰라라 할 수 없었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생활해 온 겁니다.
옷 장사를 하면서 수입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때론 재고가 생기기도 하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지출에서 줄이는 것이 옷값이다 보니 매출을 예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많든 적든 고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계획을 잡고 생활을 할 수 있는데 매달 달라지는 수입에 경화 씨의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돌고 도는 게 인생사라고 하는데 박경화 씨의 삶이 그런 것 같습니다.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생기니까요. 박경화 씨가 다시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코로나비루스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코로나비루스가 시작됐습니다.
김인선: 그러니까요. 특히 면역력이 낮은 어르신들이 모여 있는 요양병원 등에 코로나비루스가 번지기도 해서 걱정이에요.
마순희: 네. 그렇다고 쉽게 그만둘 경화 씨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시설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수시로 확진 여부에 대한 검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2주에 한 번씩 코로나비루스 검사를 받았는데 지난해 연말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를 받으며 양성인지, 음성인지 확인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사를 하면서도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경화 씨였기에 지금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요양보호사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지금의 이런 상황이 하루 빨리 나아지기를 그리고 박경화 씨의 삶이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지기를 바래봅니다.
김인선: 한 발자국 뒤에서 봤을 땐 편안해 보이는 일도 막상 해보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금방 포기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박경화 씨는 쉽게 포기하는 분이 아닌 것 같아요.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경화 씨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아닐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