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지난주에 이어 제주도에 살고 있는 김명진 씨에 대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외아들로 고령의 부모님이 계시기에 탈북을 망설였던 명진 씨였지만 먼저 한국에 정착한 처가 식구들을 통해 접한 한국 소식을 듣고 딸의 미래를 위해 탈북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부모님도 나중에 모셔오겠다고 약속했지만 험난한 탈북 경로를 너무도 잘 알기에 탈북을 권하는 대신 고향으로 돈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순희: 맞습니다. 고령의 부모님이 탈북 과정을 견디지 못 하실 것 같아서 지금도 오시라는 말을 못하고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있는 김명진 씨입니다. 명진 씨는 한국에 와서 결심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요. 처음 주택 배정을 받을 때에 거주지를 처가 식구들이 살고 있는 제주도로 신청했고 제주도에서 살게 됐지만 정착할 때만큼은 처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꼭 제 힘으로 자리를 잡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또 실천한다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진 씨는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겼고 그런 결심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자신은 없었을지 모른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정착 초반, 제주도에서 명진 씨가 한 일은 폴리텍 대학에 입학하는 거였습니다. 폴리텍 대학이란 종합기술전문학교라는 뜻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기술도 배우고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쉽게 말해 나이와 학력에 관계없이 취업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대학인데요. 실제로 명진 씨는 1년간 열심히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중장비를 다룰 수 있는 자격증들을 취득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젊은 친구들 틈에서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명진 씨에겐 또 다른 어려움도 있었겠어요. 탈북민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언어’라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제주도 말은 남한 사람들도 못 알아듣는 말이 많거든요.
마순희: 맞아요. 제주방언이 심해서 초기에는 소통 면에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시간이 약이고 노력이 비책이 됐습니다. 처음 대학에 갔을 때 어린 학생들 앞에서 말투도 다르고 나이도 많아서 대학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아예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공개하고 도움을 받기로 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 등으로 학생들과 소통하게 되었고 원만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그럼, 공부하는 명진 씨 대신 명진 씨 부인이 생활비를 벌었겠네요.
마순희: 네. 하지만 생계가 막막해서가 아니라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던 것이랍니다. 남편은 본가 가족을 두고 오로지 자신과 딸을 위해 남한행을 선택한 남편이기에 명진 씨 부인은 식당 같은 곳에서 부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명진 씨의 경우 탈북민 초기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부터 자신은 몸집도 작고 몸도 허약하니 기술을 배워서 기계를 다루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데요. 막상 하나원을 나와 보니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마침 제주도에 탈북민 정착지원기관인 하나센터가 있었던 거죠. 기술을 배우겠다는 명진 씨의 말을 듣고 제주하나센터에서 폴리텍 대학을 소개했는데요. 탈북민이 대학에서 기술을 배우게 되는 기간에는 생활비는 물론 교통비와 식비까지 지급해 주고 또 자격증을 취득하면 자격증 취득 장려금도 주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안정된 마음 덕분인지 김명진 씨는 1년간 폴리텍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중장비를 배우면서 대형차 면허, 지게차, 포크레인, 대형 덤프트럭 등 여러 개의 자격증들을 막힘없이 따게 됐고 자신감도 생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육을 모두 마친 후 실습을 하는 과정에서 고비가 생겼는데요. 실습 나가는 회사가 너무 멀리 있다 보니 차가 없는 명진 씨에게는 다니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1년 동안 공부하느라 아내 혼자 일하는 것도 안쓰러웠던 터라 김명진 씨는 일단 취업부터 하기로 마음먹게 됐다는데요. 출퇴근이 용이한 가까운 곳에서부터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백록 레미콘’이라는 지금의 레미콘 회사, 시멘트 섞는 차를 다루는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김인선: 굉장히 쉽게 취업을 한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지나가다가 우연히 대형 설비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무작정 들어가서 취업을 부탁했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공개를 하니 공부하거나 동료들 사이에 지내기가 더 편했던 것을 이미 경험했던 명진 씨는 자신은 북한에서 왔는데 취업을 부탁한다고 했다는 겁니다. 폴리텍 대학에서 여러 가지 자격증은 땄지만 아직 실습도 못 해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받아준다면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그의 솔직한 말에 사장님이 흔쾌히 취직을 승인해 주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명진 씨에게 처음 차례진 일은 사무실과 작업실의 청소나 정리작업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명진 씨는 회사에 출근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었기에 늘 남보다 30분 먼저 출근하고 30분 늦게 퇴근한다는 결심을 다지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회사의 사무실과 작업장의 모든 정리 정돈과 청소 등 자신의 일을 책임 있게 해 나가는 한편 짬 시간마다 기계 설비를 닦고 또 닦으면서 기계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쉬는 시간이나 야간에 기계를 다루어보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실습을 한 겁니다. 그래서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에는 어떤 설비든지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3년이 지난 다음에는 40여 명의 직원들의 관리를 책임진 관리과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한국 정착을 시작한 순간부터 뚝심있게 자신의 소신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김명진 씨네요.
마순희: 네.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하나 목표를 이루어 나간 명진 씨였기에 남한사회에 자신감을 가지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그의 성공적인 정착 뒤에는 말없이 남편의 모든 일을 이해하고 뒷받침해준 아내와 또 사랑하는 딸의 힘도 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네 살배기 딸애와 함께 압록강을 건널 때 안내하던 경비대의 초소장이 애가 울면 강을 건너가기 전에 잡히기 십상이니 만일 애가 울면 입을 막으라고, 그래도 안 되면 강에 버리고 가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그 말이 너무 끔찍해서 명진 씨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고 하면서 다행히 울지 않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 딸에게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었는지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명진 씨의 아내는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는데요. 호텔에서 호실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통화를 했는데 명진 씨 가정에 경사가 생겼더라고요. 한국정착 7년 만에 내 집 마련에 성공해서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네 살 때 아빠의 등에 업혀 압록강을 건넜던 예쁜 딸은 내년이면 중학생이 된다면서 공부도 잘하고 심성이 착해서 걱정하지 않는다면서 딸 자랑도 한참이나 했답니다.
김인선: 아이가 어린 나이에 한국에 왔고 가족이 모두 모여서 함께 지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거든요. 그런데 명진 씨네 가족은 화목하고 행복한 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져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명진 씨네 가족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행복하고 화목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탈북가정이 잘 유지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많거든요. 명진 씨네 가정처럼 북한에서부터 가족이 함께 탈북해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 경우에는 거의 이 가정처럼 행복하게 가정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북한에서부터 어떤 가족관계를 유지했었느냐 하는데 따라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함께 노력해야겠죠? 그래야 자식들 앞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자식들도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김인선: 지금 이 순간에도 북쪽에서, 또 남쪽에서 아이와 갈등을 겪는 분들이 있을 텐데요. 그래도 엄마니까 아빠니까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는 그날까지 조금만 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