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강한 사람, 공무원 허정숙 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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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허정숙 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정숙 씨는 중국에서 10년을 살고 2008년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이 되기까지 순탄치 못 한 과정들을 거쳤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허정숙 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또 중국에서 태어난 어린 딸에게 돈을 보내 주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무작정 신용카드 발급회사에 취직부터 했는데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900달러(100만원)를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원금도 찾지 못했습니다. 정숙 씨는 그 일로 착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에 900달러의 정착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하나하나 배우고 익혔습니다. 컴퓨터 학원에서 모르는 것을 배웠고 학원의 소개로 한 회사에 경리직으로 취직해서 약 1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1년이 지나자 회사 대표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만큼 성실히 일했다는 말인데요. 그 즈음 정숙 씨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그래서 제가 일도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회사 대표의 ‘신뢰감’까지 얻었는데도 허정숙 씨가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뭔가 일이 생겼을 것 같다고 했었잖아요?

마순희: 네. 회사에 대한 신뢰감이 허무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선 정숙 씨와 함께 일하던 언니가 정말 열심히 일하고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인데 3년이 지나도 월급이 1,080달러(120만원)에서 오르지 않았다고 해요. 정숙 씨는 ‘내가 성실하게 일을 잘 해도 월급이 쉽게 오르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장이 친척을 데려오더니 처음부터 1,080달러를 주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숙 씨는 회사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만둬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김인선: 대학 졸업 등 학력이 높지 않아도 3년이나 일했는데 연봉 인상이 하나도 안 된다면 일할 의욕이 안 날 것 같아요.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아는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 사장님이 너무 하신 거 아닌가요?

마순희: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허정숙 씨도 퇴사하면서 사장에게 ‘여기서 일하는 만큼 다른 곳에서 열심히 해서 정당한 보수를 받으려고 그만 둡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사장도 정숙 씨에게 아무런 말을 못 했습니다. 그 길로 정숙 씨는 회사를 나와 다른 일을 알아봤고 동시에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착 초반엔 학업에 대한 욕심이 없었지만 취업으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요.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에 입국하면 만 35세까지는 등록금을 지원받으면서 정규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초과되더라도 방송통신대학이나 야간대학, 사이버대학들에서는 무상으로 공부할 수 있기는 합니다만, 만 35세까지는 대학 입학부터 졸업 때까지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까지 받으면서 대학공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이탈주민 특별전형은 남한에서 탈북민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한국의 일반 대학생들과는 다르게 조금 성적이 못 미치더라도 본인이 지원하는 대학에 특례로 입학할 수 있다고 할까요? 이 특별전형 덕분에 탈북 청년들은 서울대를 비롯해서 유명대학에 입학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졸업에 있어서는 특전이 없기 때문에 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인선: 맞아요. 노력 없이 이룰 수 있는 건 없더라고요. 하지만 정숙 씨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강해서 잘 해냈을 것 같은데요.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넘었잖아요?

마순희: 네. 허정숙 씨는 한국에 입국할 때 35살이 넘었으니까요. 그래서 부업을 하면서 인터넷 강의로 학점을 따고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사이버 대학에 진학했고 사회복지와 상담심리학을 배웠습니다. 일하면서 배운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숙 씨는 주경야독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경리 일을 그만두고 부업을 하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그 시간 동안 어려운 탈북민 후배들을 도와주면서 정숙 씨는 같은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보건소마다 탈북민을 전담으로 담당하는 공무원을 뽑는데 최소 1명은 탈북민으로 채용한다는 특별채용이 있었기 때문에 도전할 용기를 냈습니다. 최종적으로 정숙 씨는 2011년, 안산시 보건소에 취직을 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특별전형의 경우 인원을 1명만 채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 자리를 놓고 많은 인원이 경쟁을 하게 되는데요. 학력, 경력, 자격증 등이 잘 갖춰져 있지 않다면 합격하기 쉽지 않거든요. 또 채용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모집 정보를 자주 살펴봐야 하는데 정숙 씨의 정보력이 꽤 좋았던 것 같아요?

마순희: 다 주변 사람들 덕분이었죠. 신변을 보호해주는 담당 형사님들도 있었고 정착도우미 분들과 사회복지관 등에서 탈북민들의 상담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정숙 씨는 그분들을 통해서 탈북민 특별채용으로 공무원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알 수 있었고 준비해야 할 서류들과 면접과정 등에 대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지원과 도움으로 정숙 씨는 공채시험에 합격했고 보건소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의료지원과 정착생활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상담업무를 하게 됐습니다. 1년이 좀 넘어서는 업무에 있어 완벽히 적응이 됐을 때 서울시청에 근무하던 유모 씨의 간첩혐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탈북민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탈북민들의 명단을 북한으로 넘겼다는 혐의였는데요. 그 일로 주위에서 정숙 씨 마저도 불신하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김인선: 아마 이때 많은 탈북민들이 정숙 씨처럼 비슷한 시선을 느꼈을 거예요. 업무 보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간첩사건의 사회적 파장이 날로 커지면서 정숙 씨를 비롯한 탈북 공무원들이 일체 탈북민들의 개인정보에 접근할 수 없게 됐던 겁니다 업무에서 거의 배제되다시피 하였으니 그 고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숙 씨는 그런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누구보다 빨리 출근했고 사무실 청소는 물론 커피를 타는 일 같은 잔심부름도 자청해서 했다고 합니다. 결국 부서에서는 탈북민 업무가 아닌 차량등록사업소의 검사원으로 정숙 씨를 발령 내렸습니다. 처음 해보는 업무가 쉽지 않았지만 정숙 씨는 그렇게라도 업무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시간을 쪼개 가면서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업무가 힘들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잘 적응해서 매일매일을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 하면서 원만하게 근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숙 씨가 다시 바빠졌습니다. 차량등록사업소에서 6년간 근무하다가 지난해 7월부터 안산시청의 토지정보과로 인사발령을 받았다고 하거든요. 새로운 보직으로 조동된 지 이제 7개월 차인데요. 얼마 전부터는 원광디지털 대학에서 명상과 요가를 새롭게 배우고 있다고 해요. 가족과 주위 사람들과도 좀 더 여유롭고 편한 생활을 위해 배우는 거라고 하더군요. 언제나 지금의 생활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것이 허정숙 씨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인선: 정숙 씨는 다른 어떤 부서로 가도 주어진 일을 척척 잘 해낼 분이실 거예요. 정숙 씨가 꿈꾸는 미래가 꼭 이루어지길 바라며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