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싶은, 김성준 씨(1)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요즘 우한폐렴, 그러니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시끌시끌하잖아요. 음력설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혹시... 하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마순희: 네. 요즘은 정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국에선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북한에 있을 때처럼 의료시스템이 너무 열악해서 전염병에 걸려도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약을 구입해서 치료받으라는 것도 아니라서요. 그리고 방역당국이 시키는 대로 외출을 되도록 삼가고 외출 시에는 마스크도 착용하고 흐르는 물에 손도 자주 씻고 우한폐렴 증세가 있으면 1339에 전화해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김인선: 저는 무엇보다 탈북민들과 중국 국경을 넘나드는 북한 주민들이 걱정이에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탈북민들이 외국여행, 특히 중국에 가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중국에 가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고 얘기들은 다들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북한 주민 여러분도 중국 오가는 경우엔 더더욱 주의하시고 깨끗이 손 씻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인선: 슬슬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볼까요? 오늘의 주인공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릴 위험이 없는 환경에 살고 계신 분이었으면 좋겠네요.

마순희: 살짝 걱정이 되긴 합니다. 뉴스를 보면 무엇보다도 학교 등 단체 생활을 하는 곳에선 비상이던데요.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은 누구보다 학생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탈북청소년, 청년들을 위한 기숙형 대안학교의 교장선생님이시거든요. 오늘은 ‘한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랑’을 구호로 삼으며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대안학교의 교장선생님, 김성준 씨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성준 씨는 1974년생이니까 올해 47살이 됐네요.

김인선: 일반적으로 남한에선 교장선생님이 되려면 최소 교육경력 15년 이상에 교감을 거쳐야 하거든요. 그래서 빨라도 50대에 교장선생님이라는 위치에 오르는데 김성준 씨는 이제 40대 후반이네요.

마순희: 네, 김성준 씨가 교장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받게 되기까지 설명을 하려면 우선 성준 씨와의 첫 만남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성준 씨는 2002년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제가 국립의료원에 근무할 때 성준 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전문체육인들처럼 성준 씨는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를 갖춘 청년이었습니다. 작은 수술을 받은 상태라 입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상담실에서 혹은 입원실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김성준 씨는 함경북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태어났지만 가정형편이 좋았고 아버지가 외국으로 나가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자본주의에 대해 빨리,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20대의 청년이 된 김성준 씨는 혼자 탈북해 중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북경에서 지내면서 한국의 교회를 알게 되었고 교회에서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7년을 그렇게 중국에서 지내다가 2002년 교회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대한민국에 오게 됐는데요. 20대 후반에 대한민국에 오게 된 김성준 씨에게도 역시 정착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몸도 마음도 다 지쳐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을 정도로 말이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저와 알고 지내게 된 거였거든요.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김성준 씨는 신앙생활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일요일이면 꼭 병원 내에 있는 예배실에서 기도하곤 했었으니까요.

김인선: 성준 씨의 신앙심이 굉장하네요. 제가 취재하면서 만난 탈북민 중에도 종교 활동을 하는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대다수였는데, 제 경험이 맞나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사실 우리 탈북민들의 종교생활을 보면 무교로 계신 분들도 있지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거의 60-70%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을 떠나서 중국이나 제3국에서 숨어 살 때,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정착을 시작하는 초기에 우리 탈북민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것도 역시 기독교, 즉 교회와 교회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거죠. 김성준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에서부터 교회를 접하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종교인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성준 씨는 한국에 오는 것도 교회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오게 됐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그렇게 한국으로 오게 된 만큼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성준 씨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35살의 나이에 기독교 관련 대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들어간 대학이었는데도 30대 중반인 김성준 씨에게는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하는 대학생활이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김인선: 낯선 환경 속에서 늦깎이로 대학생활 한다는 건 사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마순희: 그렇죠. 탈북 학생들 중에는 늦깎이 대학생들도 꽤 있는데요. 다들 이겨내고 졸업을 하는 걸보면 그렇게 대견하더라고요. 김성준 씨도 마찬가지였는데요.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그 모든 난관을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학생들에게 자신이 탈북민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저없이 어린 학생들에게도 물어보았고 도움을 받다보니 오히려 더 잘 소통이 된 것 같다고 합니다. 어린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생활하다보니 오히려 대한민국의 초년생인 그에게는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탈북민이라는 것을 열등감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한 것 같습니다.

김인선: 경제적으로 힘들었다고 표현했는데, 등록금이랑 생활비가 다 정부에서 지원되잖아요?

마순희: 그렇죠. 나라에서 나와서 문제가 없는데, 김성준 씨의 경우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느라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겁니다. 일반적으로 대학공부를 하는 탈북민에겐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금이 나오는데, 그 지원금을 쪼개서 중국으로 보낸 거죠.

김인선: 중국에 있다는 가족은 누구죠?

마순희: 김성준 씨의 부인과 자녀들입니다. 성준 씨가 탈북 후 중국에서 7년을 지냈는데 그때 지금의 부인을 만나 가정을 이뤘다고 하는데요. 가족이 모두 한국에 오면 먹고 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2002년에 성준 씨만 먼저 입국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성준 씨의 부인은 조선족이라 중국에서 지내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하고요. 하지만 두 아이를 홀로 키우기는 쉽지 않았겠죠. 그래서 성준 씨는 자신의 생활비를 쪼개서 중국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준 씨는 자신의 생계비를 아끼며 생활했습니다. 당시 성준 씨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2006년에 탈북민 대안학교를 설립했고 신앙을 바탕으로 탈북민 학생들을 키우고 있었는데요. 김성준 씨 역시 이 대안학교에서 교습도 받고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성준 씨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교회에서 전도사를 했고 2014년 4월 탈북민 청소년들을 위한 이 대안학교의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된 김성준 씨는 탈북청년들이 건전한 목표의식을 갖고 자신의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과 그들이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준 씨는 학생들에게 조급해 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건강한 선택을 하라고 조언을 해 준다고 합니다.

김인선: 자기 자신을 위한 건강한 선택을 하라는 김성준 교장 선생님의 말씀, 저도 기억할게요! 그런데, 대안학교 학생에서 대안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김성준 씨의 위치가 변해도 너무 변했는데요. 쉽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일이 어떻게 성사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집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