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많은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제2의 인생길을 찾게 됐다고 말하는데요. 어떤 사람은 동분서주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지만 간혹 새로운 사회를 배우며 적응하는 일에 소극적이고 성과 없이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 그분들을 돕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죠. 덕분에 남한 사회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을 수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데요. 10년 전만 해도 남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젠 그 역할을 하는 탈북민들도 많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정착도우미들을 비롯해서 탈북민 전문 상담사, 신변보호를 해주는 담당 경찰까지 예전엔 모두 남한 사람이었지만 서서히 탈북민들도 그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행정 업무와 민원 업무를 처리하는 주민센터를 비롯해서 지역의 공공의료기관인 보건소 등에 탈북민 공무원이 있는데요. 관내 탈북민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에서 근무하지 않아도 같은 탈북민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요. 지역마다 탈북민 자립지원협의회가 생겼고 단체를 이끄는 사람은 대부분 탈북민이랍니다.
지난주에 소개해드렸던 고영훈 씨도 그 중에 한 사람인데요. 2008년 한국에 입국한 후부터 탈북민들을 돕는 봉사활동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정착 초기, 경상남도에 거주지를 정하고 일자리를 찾으면서 하루 단위로 일을 하고 노임을 받는 일용직으로 일을 하면서도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을 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영훈 씨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됐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영훈 씨가 떠오른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2011년, 지역에서 처음 탈북민 자립지원협의회를 조직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영훈 씨를 회장으로 추천했고 영훈 씨는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김인선: 남한의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고 살기에도 바빴을 텐데 고영훈 씨는 정착 초반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남을 돕는 봉사활동이라는 게 사실 자신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할 수 있잖아요. 영훈 씨의 봉사활동 시작이 굉장히 빠른 편인 것으로 볼 때 안정된 일자리를 빨리 찾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마순희: 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영훈 씨는 처음 정착하면서부터 바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일을 가리지 않으며 경제활동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루벌이 밖에 안 되는 일용직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요양원 등에서 직원으로도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영훈 씨는 자신의 정착만 생각하지 않았고 탈북민들 모두가 함께 잘 정착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지방에서 간부로 사업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힘들게 살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추방으로 최하층 생활을 경험하게 되면서 어려운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왔을 때 인간답게, 당당하게 살겠다는 각오를 했고 영훈 씨의 그 마음은 다른 탈북민들을 향한 봉사로 이어졌습니다. 많은 남한 토박이들이 지역에 정착하는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도움이 되고 싶고 힘을 보태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훈 씨가 회장직을 맡게 된 탈북민 자립지원협의회가 만들어진 겁니다. 그게 2015년도였는데요. 이후 많은 지원사업들이 실제 탈북민들이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고 초기정착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탈북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합니다. 자립지원협의회가, 그리고 고영훈 씨가 탈북민들에게 중심축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훈 씨의 열정적인 모습에 김치후원사업을 하시는 사장님이 함께 사업을 해보자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중국에 김치공장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였거든요. 고영훈 씨는 김치사업을 하면서 벌어들인 수익금도 탈북민 자립지원협의회 운영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영훈 씨에게 복잡한 일이 생겼습니다. 탈북민 자립지원회에 지원물자들이 들어오고 영훈 씨는 실정에 맞게 어려운 탈북민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그 지원물자를 영훈 씨가 부정 횡령했다는 오해를 받게 된 겁니다. 누군가 신고를 했고 그 일로 감사를 받게 됐습니다. 물론 무혐의로 잘 해결됐고 영훈 씨는 변함없이 활동에 임했다는데요. 같은 탈북민이 의심과 오해를 해서 신고를 했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됐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영훈 씨는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김인선: 그렇죠. 고영훈 씨는 좋은 마음으로 봉사를 했는데 너무 하네요. 남들이 쉽게 못하는 일을 하고 있고 그 덕분에 많은 탈북민들의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는커녕 부정횡령을 한다고 의심을 받았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요?
마순희: 네. 처음에는 억울한 마음에 막다른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는 영훈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하지만 영훈 씨는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탈북민 동료들과 이웃들, 그리고 담당형사님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훈 씨는 그 일이 있은 후로 자신도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에게 힘을 낼 수 있게 용기를 주고 버팀목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리라 더 결심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마음이었기에 고영훈 씨는 탈북민들을 위한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서고 있습니다.
지역의 한 요양병원과 연계를 맺고 탈북어르신들이 무료로 요양을 받으실 수 있게 도움을 드리기도 하고 치과치료를 받을 수 있게 병원과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는 등 지금도 실제로 탈북민들의 정착에 도움이 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고 또 지역에 있는 어린이 보호센터에도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김치사업에서 나오는 수익금의 일부를 후원금으로 지정했다고 하는데요. 김치사업을 시작한 2010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100여 세대에 쌀과 김치를 나누어 주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영훈 씨는 북한의 가족들도 잊지 않고 잘 챙기고 있다고 하는데요. ‘다시 만나는 날까지 죽지 말고 살아만 있어 달라’고 한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우리 탈북민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너무 공감이 됐습니다.
김인선: 정말 많은 탈북민들이 북한의 가족들을 챙기면서 지내시죠. 더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기도 한데요. 최근 코로나비루스 여파로 수입이 줄어든 경우가 많습니다. 영훈 씨의 사업장은 어떤가요?
마순희: 네. 김치사업을 중국과의 무역으로 하기 때문에 영훈 씨의 사업장이 받은 타격도 무척이나 컸습니다. 하지만 영훈 씨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복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렴한 중국산 재료로 담갔던 김치 대신 국내산 재료로 명품김치를 만들어 판매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고향인 명천의 명산, 칠보산의 이름을 걸고 ‘칠보산 명품김치’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도 하고 꽤 큰 김치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몇 십 명의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주로 성장하면서 삶의 무게는 더 무거워졌지만 늘 초심을 잃지 않으며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선택에 긍지감을 가지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한 고영훈 씨의 힘찬 비상을 응원합니다.
김인선: 힘들 땐 혼자보다는 옆에서 손 잡아주는 누군가 같이 있으면 큰 도움과 위로가 되는데요. 고영훈 씨가 탈북민들에게 늘 손을 내밀어 주네요.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인데도 기꺼이 말이죠. 그 고된 짊을 묵묵히 지고 살아가는 고영훈 씨는 진정한 탈북민들의 파수꾼이 아닐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