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요즘 졸업식 시기라 그런지 학교 주변엔 차도 많고 혼잡하더라고요. 꽃다발 들고 가는 파릇파릇한 학생들 보면서 내가 학교 졸업한 지는 오래 됐구나 싶었어요.
마순희: 네, 저도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북한에서는 졸업식이라고 해도 그렇게 거창하지 않거든요. 고등중학교나 전문대 졸업식을 했어도 학부모로서 참석해 본 기억이 없어요. 어린 시절, 제 졸업식에 부모님이 참가해 본 적도 없고요. 그래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낯설었어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때마다 학부모들부터 친지들이 다 참석하고 꽃다발을 안겨주는 풍경은 처음 봤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답니다.
산에 가면 산노래, 들에 가면 들노래를 부른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탈북민 학생들도 여느 학생들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졸업식을 보내기도 합니다. 부모님 없이 혼자서 탈북한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부모 못지않게 시설이나 담당 형사님, 복지사들이 더 챙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주는 꽃다발을 아름이 벌게 받아 안고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어 안심이 되더라고요. 저도 한국에선 졸업식에 대한 추억이 생겼습니다. 대학 졸업할 때 딸들과 자유아시아방송에서 함께 했던 기자님이 꽃다발을 들고 와서 축하해주고 기념한다고 사진도 찍고 뜻 깊게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답니다.
김인선: 선생님처럼 졸업식 날의 기억이 좋은 추억이 된 사람들도 많지만, 대학졸업을 하는데 취업이 아직 안 됐으면 졸업식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더라고요. 저만 하더라도 졸업하고 한참 후에 직장에 다녔거든요.
마순희: 네. 그런데 요즘은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 중에 취업 고민을 하지 않는 학생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모든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도 하지만 간혹 취업을 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더라고요. 취업해서 일하면서도 대학공부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청년들이 취업 고민을 하듯, 중장년층의 취업 고민도 적지 않은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저도 얼마 전에 소일거리로 일자리가 있나 싶어서 구직 희망자에게 일자리를 알려주는 고용지원센터에 찾아갔다가 놀랐습니다. 고령자를 위한 취업프로그램이 많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취업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6,70대에도 일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사람들이 많아서 일자리 찾는데 시간이 걸리겠더라고요.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에 입국할 때 나이가 53세였지만 젊은이들도 어렵다는 취업에 성공했는데요. 60이 넘는 지금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분입니다. 경상북도에 살고 있는 박경애 씨인데요. 62살의 나이에도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합니다.
김인선: 물론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인데요. 지난해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 인구조사 결과를 보니까 시간제로 일하는 노동자 수가 3백만 명을 넘었더라고요. 정해진 근로시간이 일주일에 36시간 미만인 노동자를 시간제 노동자라고 하는데 그 중 60세 이상이 105만 명으로 전체의 3분의 1을 넘는 거죠. 노동시간이 짧은 만큼 로임도 적을 수밖에 없는데요. 월평균 임금이 67만원(570달러)~93만원(790달러)이라고 합니다.
마순희: 물론 정규적인 일자리에서 일할 수 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럴 조건이 안 되거나 저희들처럼 나이를 먹었거나 할 때에는 시간제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한 주일에 36시간 미만으로 일해야 한다는 말은 곧, 하루 일하는 시간이 적어서 육체적으로 부담도 적기 때문입니다. 근로 시간이 짧아서 급여도 적은 편이지만 그렇게라도 일하고 싶은 것이 6,70대의 솔직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탈북민들의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취업률이 일반 국민들보다 더 낮더라구요. 물론 건강이나 육아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말투도 다르고 회사 문화도 다른 낯선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 박경애 씨는 그런 어려움들을 다 이겨냈습니다. 경애 씨는 2010년 한국 입국 후 지금까지 쉬지않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올해 62살이라고 했으니까 한국에 왔을 때 박경애 씨 나이가 53살, 그 당시 처음엔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마순희: 네. 일반적으로 빨리 돈을 벌고 싶어 하시는 분들은 기술이 따로 필요 없는 일용직이나 식당에서 일을 시작하죠. 하지만 박경애 씨는 바로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경애 씨는 제가 한국에 들어올 때와 나이가 꼭 같았는데요. 저는 그 나이에 일자리를 찾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서울이라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애 씨의 거주지는 경상북도인데 회사들이 많은 거제가 가깝다 보니 취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기업의 단열재 제조회사에서 제품 포장을 하는 일이었는데요. 난생처음 해보는 거라 힘들기도 했고 두려움도 없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다고 시키는 대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것은 당당히 말하고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제때에 수정도 하고, 눈썰미 있게 작업을 하다 보니 작업 속도도 높아지고 자신감도 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눈썰미라고 표현을 하셨지만 그게 바로 업무와 관련된 감각이거든요. 혹시 북쪽에서의 경험으로 그런 감각이 생긴 걸까요?
마순희: 아니요. 그저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성실성과 높은 책임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박경애 씨의 고향은 중국이라고 하는데요. 네 살 때 아버지의 등에 업혀 북한으로 나갔고 경애 씨 가족은 함경남도에서 생활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북한에서 성장했고 성인이 돼서 결혼도 했습니다. 평범한 주부로 살던 경애 씨였는데 기업소 자재 인수원으로 일하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자 전업주부였던 경애 씨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살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자 경애 씨는 친척이 있는 중국으로 두 자녀를 데리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촌 언니네 집에 함께 살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경애 씨의 두 자녀들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생이별이겠어요.
마순희: 그대로 잡혀가면 자식들과 영영 이별이라는 생각에 경애 씨는 함께 잡혀가던 사람들과 도망칠 계획을 했답니다. 달리는 열차에서 탈출해 숨어 있다가 그날 밤으로 다시 압록강을 건넜고, 언제라도 체포되어 북송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경애 씨는 두 자녀를 데리고 멀리 산동성의 한족마을에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한족 동네였지만 마음씨 착한 남편을 만나 애들을 키우고 함께 살다가 한국행을 도와주는 브로커를 알게 되었습니다. 안전 문제 등의 이유로 경애 씨와 아들이 먼저 한국으로 왔고 탈북비용을 모은 뒤 딸과 한족 남편까지 데려오게 되었다는데요. 자신을 도와주었던 한족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켜 한국까지 국제결혼으로 데려오는 것을 보고 경애 씨의 성실성과 의리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경애 씨와 이야기 나누면서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성애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점이 저를 많이 감동시켰습니다.
김인선: 책임감, 모성애, 의리라고 하셨는데요. 왠지 그 감정들 때문에 박경애 씨의 삶이 결코 편치 않았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마순희: 그렇죠. 한족 남편을 한국으로 데려왔지만 한국말을 할 줄도 모르고, 알아듣지도 못했습니다. 경애 씨에게야 익숙한 모습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아니겠죠?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일하러 집밖을 나서기도 쉽지 않았고 어렵게 일자리를 얻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구박받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안 보면 몰랐겠지만 어느 날 경애 씨가 그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 후론 경애 씨가 일하는 곳으로 남편을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김인선: 덩치 큰 아이를 키우는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경애 씨의 한국살이가 고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경애 씨가 지금까지 살아온 한국에서의 삶, 그리고 일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해서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