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홀로서기, 미용실원장 김희영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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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요즘 거울을 들여다보기가 왜 이렇게 싫을까요? 겉모습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거울을 보면 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것 같고 혈색도 안 좋아 보여서 속상하더라고요.

마순희: 왜 그러세요? 저는 선생님을 볼 때마다 초등학생 딸을 둔 엄마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는데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 더 중요하니까요. 내면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힘을 발휘하는 지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을 통해 알려 드릴게요. 나이는 어리지만 성숙해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젊은 미용실 원장이랍니다. 2011년에 한국에 정착하여 경남 창원에서 6년째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33살 김희영 원장님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김인선: 33살! 부러운 나이네요. 젊다는 말보다 어리다는 표현을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 ‘성숙해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김희영 씨’ 라고 소개를 한 걸 보면 뭔가 변화를 많이 겪었을 것 같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김희영 씨는 23살 어린 나이에 혼자 한국에 왔지만 온갖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한국정착 5년 만에 미용실 원장이 됐으니까요. 희영 씨가 한국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북한에서 지내온 시간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은데요. 16살 어린 나이부터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을 정도로 당차게 살아온 여성이었더라고요. 부모님과 여동생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살았었는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16살 때부터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희영 씨는 가난한 가정 형편과 성격이 괴팍한 아버지 밑에서 맏딸로 성장하다 보니까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부모님을 따라 밀수도 하고 또 혼자서 물건을 건네 받아 팔기도 했었는데 장사가 잘 될 때도 있었지만 잘 안 될 때가 더 많아서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김인선: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은 탈북민들을 만나보면 정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너무들 고생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희영 씨는 그래서 탈북을 결심했던 건가요?

마순희: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죠. 당시에 정말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고 그대로는 얼마 못 버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희영 씨가 23살이 되던 2011년의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아저씨가 중매를 서 준다며 희영 씨네 집에 찾아 왔습니다. 희영 씨는 중매 상대의 직업이며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는데요. 그 아저씨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식구들의 눈치만 살폈다고 합니다. 희영 씨는 제대로 말을 못 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고 대뜸 중매 상대가 중국 사람임을 직감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물었더니 실제로 중국에 있는 43살 총각이라고 했답니다.

김인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도 있긴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나 나이차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영 씨 본인의 결정이 중요하겠지만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을까요?

마순희: 마음은 그랬을지언정 쉽게 안 된다는 말도 못했을 겁니다. 당시 장사가 잘 되지 안돼서 매일 매일을 버티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라 희영 씨 부모님은 은근히 딸이라도 배불리 먹으며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차마 딸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희영 씨의 눈치만 살폈다고 하더라고요. 희영 씨는 20살이라는 나이차이가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힘든 상황을 피해 어디든지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던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말 없이 중매쟁이 아저씨를 따라 무작정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가보니 상대는 43살 총각이 아니라 52살, 희영 씨 아버지 나이보다 많은 사람이더랍니다. 43살이라고 해도 용납하기 힘들었는데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남자였으니 기함할 노릇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도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희영 씨 본인이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상대 남자도 희영 씨가 너무 어리다고 느꼈는지 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게다가 희영 씨에게 한국에 가라고 브로커 선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희영 씨는 큰 어려움 없이 탈북 후 두 달 만에 무사히 한국에 입국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돈 벌러 가는 줄 알고 중국에 갔다가 인신매매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까지 낳는 탈북 여성들도 많은데, 그에 비하면 김희영 씨는 굉장히 운이 좋네요. 그럼 한국에 꽤 어린 나이에 왔겠네요?

마순희: 네. 23살에 왔으니 어린 편이죠. 앞날이 창창한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왔지만 희영 씨의 한국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중매로 만나 한국행을 제안했던 그 50대의 중국남자는 먼저 한국에 와서 희영 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행 비행기를 탔고 희영 씨는 여느 탈북민들이 겪었던 것처럼 힘들게 메콩강을 건너 2달이 걸려 왔거든요. 게다가 그 남자는 희영 씨에게 결혼을 요구했습니다. 희영 씨는 무사히 한국까지 올 수 있게 도와 준 그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시 남자는 암 투병 중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희영 씨는 탈북민의 초기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고속도로 요금소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남한 정부에서 탈북민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탈북민을 고용하는 회사 측에 매월 450달러(50만 원)에서 635달러(70만 원)를 최대 3년까지 지원해주기 때문에 정착 초기 탈북민들도 마음만 먹으면 비교적 쉽게 취업이 가능한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희영 씨의 남편은 매일 일하고 돌아오는 희영 씨만 바라보며 집에서 지냈습니다. 회사에서 늦으면 왜 늦느냐, 오늘은 몇 시에 오느냐 등 간섭이 늘어났고 도망가려고 하는 건 아닌지 희영 씨에 대한 의심이 나날이 심해져 갔습니다.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자꾸만 의심을 하는 의처증 증세까지 보였고 자기 화에 못 이겨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김인선: 나이는 많아도 희영 씨의 한국행을 도울 정도로 착한 분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네요. 게다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에서 가정폭력은 처벌 수위가 한층 높아졌을 정도로 심각한 범죄입니다. 아무리 부부 사이일지라도 신체적인 폭력뿐 아니라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성적으로 학대를 해도 범죄행위에 속하는데요. 모욕감을 주는 말을 비롯해서 협박의 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행위나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는 경우도 가정폭력에 해당된다는 걸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특히 탈북민들이 가정폭력에 대해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가정사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요. 희영 씨는 어땠을까요?

마순희: 희영 씨 역시 처음에는 가정폭력은 가정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혼자서만 고통 받으며 참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자의 집착은 점점 더 심해지고 칼을 빼 들고 위협을 가하는 일까지도 빈번해졌다고 합니다. 참고 살던 희영 씨는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기 때문에 결국 담당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23살의 자신이 어떤 사연으로 52살 되는 남자를 만났고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는지,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그동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했습니다.

김인선: 희영 씨가 담당 형사에게 손을 내민 건 현명한 선택을 한 거예요. 경찰서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의 행정업무와 민원업무를 처리하는 주민센터 등 각급 기관에서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니까요. 혹시 가정폭력을 겪고 있는 탈북민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의 초기 생활, 지금까지 들은 얘기는 속상한 것 투성이인데요. 그로부터 지금까지 희영 씨에게 어떤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을 지,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