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김희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희영 씨는 2011년에 한국에 정착했는데요. 북한을 떠나 중국에 도착한지 2달 만에 한국에 온 셈이었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김희영 씨는 23살, 비교적 어린 나이에 혼자 한국에 왔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16살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던 희영 씨는 일찍 철이 들었는데요. 7년이 지나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고 집을 떠나 어디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때마침 가까운 지인이 중매에 나섰는데 중국사람이고 20살이나 많은 남자였습니다. 희영 씨는 중매쟁이 아저씨를 따라 무작정 압록강을 건넜고 중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상대는 29살이나 많은 52살 남자였습니다. 용납하기 힘든 나이 차이였지만 희영 씨는 북한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고 또 돌아가는 길도 위험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이 많은 그 남자는 희영 씨에게 한국에 가라고 브로커 선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희영 씨는 큰 어려움 없이 탈북 후 두 달 만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한국에 도착해 보니 52살의 그 중국남자가 희영 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인선: 혹시 그 중국남자가 뭔가 대가를 바라고 나타났을까요?
마순희: 네. 중국에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그 남자는 한국에서 희영 씨에게 결혼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을 무사히 한국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기에 차마 거절 못하고 희영 씨는 혼인신고를 했는데, 당시 남자는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희영 씨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탈북민 초기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고속도로 요금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일하는 것은 견딜 만했지만 집에만 있던 남편이 희영 씨를 힘들게 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폭력적인 면까지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까지 생겼고 희영 씨는 담당 형사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습니다.
담당형사님은 희영 씨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는데요. 덕분에 희영 씨는 중국인 남자에게 위자료를 주고 지옥 같은 8개월간의 혼인관계를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한국에서 이혼 위자료라고 하면 이혼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줘야 하는 손해배상금으로 알고 있어 의아해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희영 씨가 폭력을 당했는데도 상대에게 오히려 위자료를 주게 된 이유는 한국까지 오는데 거금의 브로커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의 돈으로 한국까지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 돈을 물어주고 깨끗하게 헤어지는 것이 희영 씨에게도 속 편한 일이었을 겁니다. 법적으로 남편이었던 그 남자는 중국으로 돌아갔고 희영 씨는 악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났습니다.
김인선: 힘들었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마음의 상처도 잘 회복하고 홀로서기에도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마순희: 네. 희영 씨는 처음 취직했던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계속 일을 하면서 홀로서기를 시작했습니다. 통행료를 받는 요금소 업무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기에 탈북민들이 초기 정착할 때에 많이들 지원하는데요. 그러나 그 업무도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운전자들과 잦은 시비가 붙거나 크고 작은 문제들도 생기곤 한다는데 그럴 때마다 참지 못 하고 일일이 대응하다 보면 오래 버티지 못 하고 일을 그만두는 경우들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희영 씨가 볼 때 남한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먼저 사과하거나 못 들은 척 피해가는 문제들도 탈북민들은 자존심이 상한다고 쉽게 소리를 높이거나 자신을 무시한다고 억울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탈북민들이 회사생활에 적응도 잘 못 하고 일자리도 자주 바뀌게 되는 거죠.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희영 씨는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더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남한 정부에서 탈북민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탈북민을 고용하는 회사 측에 매월 450달러(50만 원)에서 635달러(70만 원)를 최대 3년까지 지원해주기 때문에 정착 초기 탈북민들도 마음만 먹으면 취업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일을 하느냐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희영 씨는 3년을 근무하고도 재계약을 해서 다시 1년을 사무직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김인선: 회사 측에서 정부의 탈북민고용지원금을 다 받고 나면 탈북민과의 계약을 해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희영 씨의 경우처럼 재계약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성실하게 일을 잘하는 소수 인원만 해당되는데,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3년 단위로 계약을 하니까 재계약을 했다면 6년 동안 근무가 가능했을 텐데 희영 씨의 근무기간은 4년이네요?
마순희: 네. 안타깝게도 희영 씨가 근무하던 요금소가 자동화시스템으로 전환되면서 없어졌거든요. 전자 카드를 삽입한 단말기를 차에 장착하고 요금소를 지나면 자동으로 통행료가 지불되기 때문에 요금소 직원이 필요 없어진 거죠. 희영 씨를 비롯해 같은 요금소에서 근무하던 직원들 대부분이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희영 씨는 요금소가 없어진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사람처럼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요금소 일은 하루 3교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8시간만 근무하면 쉬는 시간이 많습니다. 희영 씨는 단조롭고 기계적인 업무를 하면서 언젠가 자신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는 불안정한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희영 씨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미용사가 떠올랐고 주저 없이 미용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용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론 시험에 바로 합격했고 실습도 일하는 짬짬이 배우고 숙련해서 요금소에서 일하는 4년 동안에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합니다. 그런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희영 씨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어도 화를 복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마침 사업을 접으려고 조금은 싼 값으로 내놓았다는 지금의 미용실이 있었고 희영 씨는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김인선: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4년간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겠지만, 중국남자에게 위자료를 줬기 때문에 자신의 명의로 된 미용실을 인수하기엔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3년 동안 주는 취업 장려금도 모두 받았지만 그 돈으로도 미용실을 차리기에는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대출제도가 있잖아요? 우리 탈북민들에게는 좀 낯설기는 하지만 부동산이나 주택 등 재산을 담보로 하는 담보 대출, 직장인 대출, 학자금 대출 등 돈을 빌려주는 제도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물론 희영 씨에겐 담보로 할 만한 재산은 없었지만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소상공인들을 위한 대출제도가 있어서 그것을 활용했습니다. 원래 미용실을 운영하던 곳이었기에 설비 투자비도 절감하게 되어 처음 시작하는 희영 씨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초기에 대략 9천 달러(1천만원) 정도의 대출을 받았다는데요. 미용실을 시작한지 1년도 안 되었을 때 대출금을 다 갚았답니다.
북한에서 했던 장사 경험 덕분인지 손님들과의 관계도 좋았고 단골손님도 많아졌습니다. 북한에서 와서 열심히 사는데 자주 와야겠다며 단골이 되기도 하고 지인들도 데리고 와서 함께 단골이 되는 손님도 더러 있다고 하는데요. 희영 씨가 성격도 활달하고 친화력도 있어서 손님들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같은 코로나비루스 상황 속에서도 희영 씨의 미용실엔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고 하는데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단골집으로 사랑받을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김인선: 북한에는 단골이란 말이 없다면서요? 한국에서 단골집은 언제 가도 마음 편한 나만의 가게를 말하는데요. 희영 씨의 미용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단골집이 됐다는 것은 그만큼 김희영 씨가 주변에 인정받으며 잘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33살, 아직은 많지 않은 나이지만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김희영 씨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마순희의 성공시대였고요.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