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요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19 때문에 걱정이 참 많은데요. 무탈하시죠?
마순희: 네, 선생님도 이렇게 무탈하게 다시 만나서 다행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아직 신종 코로나 확진자가 없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약속된 일정들이 줄줄이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하루 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인선: 각자 개인위생에 철저히 신경쓰고 노력해서 이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조심하다 보니 바깥 활동을 최소화하게 되는데요. 자영업자들, 특히 장사하시는 분들의 걱정이 많더라고요. 탈북민들 중에도 장사하시는 분들이 꽤 많으시죠?
마순희: 네, 개인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걱정이 많습니다. 탈북여성들이 하는 사업 중에서 음식장사를 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오늘도 지나오면서 탈북여성이 운영하는 명태찜 식당을 보니까 다른 때 같으면 손님들로 붐빌 시간이었는데 식당이 휑해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도 전라남도 여수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는 분인데 이 지역은 아직까지 손님 숫자가 많이 줄지는 않고 있다고 하네요. 오늘의 주인공은 여수에서 올해로 5년차 ‘함흥매운탕’ 집을 운영하고 있는 49살 김영실 씨입니다.
김인선: 남한에서 전라도는 음식 맛이 좋기로 유명하거든요. 어지간한 솜씨로 식당을 했다가는 망하기 쉬운데요. 그런데 김영실 씨가 전라도 여수에서 음식장사를 시작했다고요?
마순희: 모르면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됐다고 표현해야 더 알맞을까요? 아무래도 영실 씨에 대한 긴 얘기를 해야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전라도에서 음식장사를 시작하게 된 배경에 대해 말하려면, 북쪽에서의 사연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영실 씨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시였습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북한에서는 가장 유명한 기업소인 함흥에 있는 2.8비날론 공장에서 일했는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함흥시 역시 노동자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게 어려워졌습니다. 영실 씨네 가정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영실 씨는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서 생계를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과일 장사도 하고 음식 장사도 하고 마지막엔 동 장사까지 했다고 합니다. 함흥에서 동을 사가지고 신의주 쪽으로 가서 중국사람들에게 넘기는 건데 수입이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종종 그렇게 번 돈을 단속에 걸려서 모두 빼앗기고 밑천까지 탈탈 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고단함을 나눌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벌이를 할 만한 다른 가족은 없었나 봐요.
마순희: 그런 셈이죠.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군사복무 중인 남동생과 어린 동생들뿐이거든요. 군대에 나가있던 남동생이 휴가 차 고향에 와서 영실 씨와 어머니가 사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도 마음 아파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군사복무를 하고 있는 양강도는 산골이라, 그래도 감자농사라도 지어서 굶지는 않더라고 하면서 한 번 찾아오라고 하더랍니다.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자 영실 씨는 어머니와 같이 동생을 찾아 떠났습니다. 하지만 가는 동안 군사 복무하는 동생에게 손을 내미는 것보다 차라리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실 씨는 반대하는 어머니를 어렵게 설득하고 중국으로 떠나려고 혜산으로 갔는데 거기서 잡혀서 한 달 반 동안 강제노동을 하게 됐고, 강제노동에서 풀려난 즉시 다시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이별이 됐습니다. 영실 씨가 중국에 가 있는 동안 병약했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김인선: 그럼 그 뒤로는 고향으로 다시 안 돌아갔나요?
마순희: 원하지 않는 귀향을 하긴 했죠. 영실 씨는 중국에 10년을 살면서 네 차례나 잡혀 북한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중국에서 한 달을 살다가 잡혀 나갔고 풀려나는 즉시 또다시 탈북하기를 네 번이나 반복하게 됐는데요. 북한에서는 열심히 노력해도 죽도 제대로 못 먹는데 중국에 오면 아무리 못 살아도 쌀밥에 고기반찬도 싫어서 안 먹을 정도니 잡혀 나갔다가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가게 되더랍니다. 영실 씨뿐 아니라 다른 탈북민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북한에 잡혀 나가서 강제노동을 하고 풀려나면 또다시 강을 건너기를 네 번! 그런 상황들이 반복되면 나름대로 요령도 생기고 대처하는 방법도 새로워지는 거랍니다.
영실 씨 역시 국경지대에서 살다가는 언제 단속에 걸릴지 모를 계속 불안한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마지막에는 국경에서 멀리 중국 내륙에 깊숙이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한족 동네라 처음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밖에 안 나가다 보니 오히려 안전하기는 했다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일해도 북한에 돈 한 푼 마음대로 보낼 수도 없었고 결혼했지만 아무런 자유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 수 만은 없다는 생각에 남편과 헤어지고 다시 시내에 나가서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일한 것만큼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았고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식당을 꼭 차리고 싶다는 작은 꿈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실 씨는 그렇게 중국에서 10년을 살고 2009년 자유를 찾아서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혼자 대한민국에 온 영실 씨는 모든 것을 자신이 스스로 결심하고 선택하고 해 나가야 했습니다.
김인선: ‘인생은 선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 순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그게 가장 어렵다고들 합니다. 아마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부터 그 선택이란 게 시작되죠?
마순희: 맞습니다. 하나원에서는 대한민국에 대한 안내책자가 나오는데 탈북민들은 그 책을 보면서 자신이 어디서 정착할지를 결정하게 되거든요. 영실 씨는 그 책을 보면서 여수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영실 씨의 첫 번째 선택이었죠. 여수시에 가면 큰 화학공장이 있다는 안내책자 자료를 봤기 때문인데요. 함흥에 있을 때 화학공장에서 일했던 영실 씨였기에 취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또 비록 고향의 동해바다는 아니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는 점에서도 여수에 끌렸고요. 하지만 아무런 경력도, 자격도 없는 30대 중반의 영실 씨가 오자마자 그렇게 큰 회사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기본적인 학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김인선: 화학공장에서 일하려면 생산직이라도 최소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 하니까요. 공장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간 여수, 영실 씨의 첫 번째 선택의 결과는 어땠나요?
마순희: 정말 다행인 게 영실 씨는 어떤 어려움들이 생길지 몰라도 하나도 겁나지 않았답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꼭 잘 정착하리라고 결심을 했고 자신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일자리를 찾다 보니 가장 많이 눈에 뜨이는 곳이 식당이었습니다. 식당일이라면 중국에서도 경험이 있었기에 스스로 식당에 찾아가서 일자리를 알아 볼 정도로 당차게 행동했습니다. 중국에서 식당일을 하는 동안 자신의 식당을 차리고 싶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식당 일을 시작했고 6년간 일하다 지금은 5년 째 자신만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인선: 한국에 와서 식당에 취직을 했다고 하면 설거지나 음식을 나르는 일을 하게 되는데, 영실 씨는 음식 만드는 것도 배웠나 보죠?
마순희: 맞아요. 처음에는 주방에서 보조로 식재료를 다듬고 잔심부름과 식당 청소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영실 씨가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몇 달을 지내면서 식당용어까지 알게 되다 보니 어떤 일을 맡겨도 척척 해낸 것입니다. 일솜씨도 깐지고(야무지고) 사교성까지 좋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잘했고 사장님의 신뢰도 두터워졌습니다. 영실 씨의 경우 잔심부름부터 식당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을 다 경험했기 때문에 식당을 여는 일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식당 이름은 고향의 이름을 따서 ‘함흥매운탕’이라고 지었습니다.
김인선: 경험만큼 좋은 밑천은 없다고 하는데요. 김영실 씨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어엿한 식당 사장님이 됐다는 김영실 씨의 이야기, 다음 시간에 계속 됩니다. 오늘 마순희의 성공시대는 여기까지 할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