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공짜는 없다’, 전기기사 이정현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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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어느덧 새로운 봄이 시작되는 3월이네요. 추운 겨울이 지나고 포근한 봄이 된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도 봄바람이 스며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복권이라도 당첨된다면 마음이 정말 포근해질 것 같은데 가끔 사보지만 저는 그때마다 꽝이 나오더라고요.

마순희: 그런 생각 안 해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아요. 저도 사 보는데 기껏해야 4.5달러(5000원) 맞아 본 적이 한두 번이고 매 번 꽝이랍니다.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또 사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운을 바라고 복권을 사는 모습을 보면 곁에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며 조언을 할 사람이 있는데 오늘은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가까운 탈북 후배들에게도 세상에 공짜는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정현 씨를 소개해 드릴게요.

김인선: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철이 들었다고 말하더라고요. 이정현 씨는 일찍 철 든 분일까요. 아니면 인생의 경험이 많은 지긋한 분일까요?

마순희: 네. 오늘 소개해 드릴 이정현 씨는 올해로 61살, 한국에 온지도 13년이 된 분이랍니다. 제가 국립의료원에 근무하던 2009년에 이정현 씨를 처음 만났었는데요. 10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내지만 늘 한결같이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가고 있는 변함없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 감탄스럽기도 하고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어요. 겪어보니까 북한에서도 성실하고 근면했던 가장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정현 씨는 양강도 출신으로 자재상사에서 근무하면서 전기 부문의 자재를 인수하는 등 사업을 하면서 처와 세 자녀를 키우면서 살았습니다. 자주 출장을 다니는 직업이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외부의 정세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데요. 아무리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 자라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일단 정현 씨 먼저 중국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그 후에 가족을 데리러 나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정현 씨는 2006년 1월에 중국으로 들어갔고 매일 매일을 위험을 피해 숨어 살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했고 그 해 11월에 체포되어 북송됐습니다. 북송되어서는 함경북도의 한 집결소에 수감되어 강제노동을 했는데, 수감된 지 2달 만인 2007년 1월에 12명이 함께 탈출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집결소나 수용소의 경우 감시 관리가 굉장히 삼엄하잖아요. 혼자 탈출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12명이 동시에 탈출이 가능했을까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북한의 관리감독이 삼엄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동시에 탈출을 시도한 것은 그에 따른 책임 역시 얼마나 큰 지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집결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동작업을 하게 됐는데, 건장한 청장년들을 골라서 건설용 블록크를 제작하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함께 일하던 동료 두 명이 도망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연대적 책임을 물어 자신들도 집결소에 돌아가면 무사치 못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이정현 씨 일행은 집결소로 돌아가기 전에 그곳을 탈출할 계획을 짰다고 합니다. 새벽시간 미리 계획한 대로 화장실을 가라고 문을 열어주는 순간 12명이 갑자기 뛰쳐나가 도망을 쳤답니다. 동시에 12명이 산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을 가다 보니 경비원들도 당황해서 갈팡질팡하면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탈출에 성공해서 다행이긴 한데 그럼 그 길로 다시 중국으로 갔을까요?

마순희: 아뇨. 정현 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한 후에 가족에게 향했습니다. 함경북도에서 가족이 살고 있는 양강도까지 단속을 피해 산길로 걸어 가다 보니 10여 일이 걸렸다고 하는데요. 산속에 피신해 있으면서 어렵게 가족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자신의 탈출로 가족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됐으니까요. 그래서 아예 조금이라도 빨리 가족과 함께 탈북하기로 한 거죠. 정현 씨와 온 가족은 산 속에서 지냈습니다. 집결소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살아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이 절망 속에서 지내던 가족에게는 이정현 씨가 살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은 꿈같은 소식이었고 다시 만난 가족은 산속에 움막을 짓고 부대기농사도 하고 약초도 캐서 팔면서 버틴 거죠. 거의 1년을 버티다가 그해 11월 정현 씨는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갔고 어려운 여정을 거쳐서 2008년 4월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김인선: 온 가족이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인 것 같아요. 먼저 탈북한 뒤 나중에 자녀들을 데려오는 경우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마음의 거리가 생겨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이정현 씨의 경우 어려운 탈북 과정을 아이들과 함께 겪으면서 한국까지 왔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이정현 씨 가족은 북한을 떠나 한국까지 오는 위험한 여정을 내내 함께 했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도 함께 지내면서 더 돈독해졌습니다. 가족이 함께 한국에 온 경우 하나원 안에서도 함께 지내게 해주거든요. 이정현 씨는 그래서 더더욱 한국에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하나원에서 3개월 생활할 때에도 한 기수의 교육생들을 책임지는 총무의 책임을 맡을 정도로 매사에 열심이었다고 하는데요. 하나원 안에서도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성실하고 책임성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정현 씨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안고 하나원을 나온 후 3일 만에 하루 일한 만큼 돈을 받는 일용직으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건설현장에서 설비나 자재를 철거하는 작업을 했는데 하루 종일 무거운 철근을 나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그런 일자리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김인선: 맞아요. 하루 단위로 근로 계약을 체결하고 로임을 받는 일용직 중에서도 건설현장에서 하는 일용직 일은 힘들고 위험해서 보수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기술이 없는 단순 노동자들은 원한다고 매일 일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마순희: 맞습니다. 그래서 정현 씨는 일감이 없는 날에는 주유소에서 부업을 하기도 하고 냉풍기(에어컨) 설치기사로도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일자리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탈북민들이 처음부터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취업훈련을 받고 자격증도 취득하고 어느 정도 사회에 대해 알게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남들보다 좀 빨리 찾았다 싶은 경우엔 중간에 그만 두는 경우도 생기니까요. 이정현 씨의 경우에는 취업훈련으로 전기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는데요. 취업으로 이어지지는 못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업도 하고 일용직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의 쌀가게에서 일할 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정현 씨의 성실함과 가정형편까지 잘 알고 있는 지인이 알려준 거죠. 마침 주인이 탈북 여성이었습니다. 사장도 가장으로서 정현 씨의 사정을 잘 알고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고 정현 씨 역시 제 집 일처럼 진심으로 최선을 다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열심히 일한 만큼 급여도 올려주고 상금(보너스)도 챙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일하던 중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습니다. 출퇴근을 오토바이를 타고 했는데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것입니다. 그 이후 정현 씨는 쌀가게에서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됐습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이야기 들었던 정현 씨라면 다친 다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했을 분일 것 같은데, 무슨 이유로 일을 할 수 없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