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정현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지난주, 정현 씨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고 말하는 분이라고 소개를 해 주셨는데요. 올해 61살로 한국에 온 지 13년 된 분이고,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다, 한국에는 부인과 세 자녀까지 온 가족이 함께 왔다… 이 정도로만 이야기 했잖아요?
마순희: 네. 오늘 자세히 남은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2008년 4월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입국한 이정현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지내는 3개월 동안 같은 기수의 교육생들을 책임지는 총무 역할도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한국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현 씨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원을 나온 후 3일 만에 일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여성의 경우 식당 일처럼 단순한 일이 대부분이고, 남성의 경우 하루 일하고 하루 일한 만큼 돈을 받는 일용직이 대표적인데요. 정현 씨 역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으로 일했다고 했어요.
마순희: 네. 이정현 씨는 건설현장에서 설비나 자재를 철거하는 작업을 했는데 하루종일 무거운 철근을 나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이 힘든 것보다 더 걱정인 것은 그나마 그런 일자리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비 오는 날이거나 전문 기술이 필요한 날에는 단순 현장 일자리는 필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정현 씨는 일감이 없는 날에는 부업을 했습니다.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기름 넣는 일부터 냉풍기(에어컨) 보조 설치기사로도 일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열심히, 성실히 하는 것만이 정현 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정현 씨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겐 신뢰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정현 씨의 성실함과 가정형편까지 잘 알고 있는 지인이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의 쌀가게에서 일할 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정현 씨는 쌀가게로 향했고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주인이 같은 탈북민이라 정현 씨의 상황을 잘 이해했고 열심히 일한 만큼 로임도 충분히 챙겨줬습니다. 계속해서 일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치면서 병원생활을 해야 했고 그 이후 정현 씨는 쌀가게에서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됐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몇 개월 동안 쌀가게 사장님이 치료비와 생활비를 보태줬지만 마음의 부담이 됐기 때문입니다.
김인선: 쌀가게 사장님이 그래도 큰 도움을 주셨네요. 그런데 다쳐서 몇 달이나 일을 쉬다 보면 생계에 대한 부담감이나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점점 더 커졌을 것 같아요.
마순희: 어쩔 수 없이 쉬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정현 씨는 낙담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의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불편한 다리로 그전처럼 일을 잘 할 수도 없었기에 본인이 스스로 쌀가게 일을 그만두고 인천에 있는 중장비학원에 등록하고 다시 취업준비를 시작했던 거죠. 정현 씨는 다리가 조금 나아지자 이제는 기술을 배워서 일하다가 다쳐도 회사와 사회로부터 각종 보장을 받을 수 있고 고용도 안정적인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인천 제물포에 있는 중장비학원에 등록하고 6개월 과정을 열심히 수료했습니다. 그러나 시험 역시 만만치 않아서 무려 여섯 번의 시험을 거쳐서야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격증으로 2012년부터 경기도에 있는 한 회사에 전기설비 관리업무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과정은 오래 걸렸지만 안정적인 회사에 입사도 했고, 조직생활만 원만하다면 걱정이 없겠어요. 탈북민들이 어려워하는 일 중의 하나가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라고 하는데 정현 씨는 어땠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안정적인 회사에 취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취직한 일자리에서 오랫동안 장기근속하려면 직장동료들과의 관계 역시 취직 못지 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직장생활에서 제기되는 여러 어려움들은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탈북민들에게는 더 어려운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탈북민들을 만나보면 회사에 근무하는 분들 중에서 그런 어려움들을 겪지 않고 적응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니까요. 이정현 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한민국에 와서 열심히만 일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보수도 올라간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실제 처음 쌀가게에서 일할 때에는 자신이 주인다운 입장에서 제 일처럼 진심으로 일하니 사장이 엄청 좋아했고 급여도 올려주고 보상금까지 뒤따라 왔으니까요.
그러나 개인사업장이 아닌 회사생활에서는 혼자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회사마다 사정이 다 다르겠지만 정현 씨가 다닌 회사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주어진 업무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은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스스로 일감을 찾아서 더 하다 보니 동료들이 좋아하지 않았고 소외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도 함께 보면서 일하고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면서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주변 동료들도 정현 씨의 진심을 알게 되고 허물없이 지내게 됐다고 합니다.
김인선: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고 하는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정현 씨의 바깥일이 술술 풀리는 것처럼 집안일도 술술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보니까 큰 아이와 막내가 15살 차이가 나네요? 아이를 어느 정도 다 키워놓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늦둥이는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집안 분위기까지 밝게 해줘서 축복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정현 씨네도 마찬가질까요?
마순희: 이정현 씨의 가정에서도 늦둥이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40대 중반, 북한의 산속에 숨어 살던 그 어려운 시기에 선물처럼 찾아와준 사랑하는 막내아들이라고 하는데요. 다 큰 자식들도 막내한테만은 끔찍했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은 그런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잘 자라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9살이 됐을 때 청천벽력 같은 백혈병이 찾아왔습니다. 언젠가부터 자주 감기처럼 열이 나고 코피를 자주 흘렸는데요. 그게 백혈병 증상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처음에는 그런 증상을 보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다른 세 자녀들은 모두 한국에 와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딸들은 출가하고 아들은 중견기업에 입사해서 이제 한시름 놓을까 했는데, 온 집안의 웃음이요, 기쁨이었던 막내아들에게 큰 일이 생긴 거죠. 그때 정현 씨의 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막내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김인선: 정현 씨도 늦둥이도 그리고 가족 모두가 꿋꿋하게 잘 이겨냈으면 좋겠네요. 예전에는 백혈병이 완치가 힘든 불치병으로 여겨졌지만 치료기술이 발달되면서 완치가 가능하니까요.
마순희: 네. 치료비용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소아 백혈병 어린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사회지원제도의 혜택들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은 치료를 잘 받고 있는데 가장 힘든 것이 그 어려운 항암치료를 견디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정현 씨는 평범한 하루를 안정적으로 보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지를 깨닫게 됐다면서 매 순간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력 없인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공짜를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정현 씨입니다. 올해로 막내아들은 5년째 투병을 하고 있는데요. 다행히 지금은 많이 호전되어가고 있다고 하니 하루 빨리 완치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김인선: 이정현 씨의 말처럼 세상에 공짜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셨잖아요? 앞으로도 이정현 씨의 노력만큼 원하는 성과를 이루실 거라 믿습니다. 늦둥이 막내아들의 건강까지도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