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맞이하면 세상에 속상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요. 말이 쉽지 현실적으론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마음먹은 대로, 원하는 대로 일이 잘 안 풀릴 때 제가 좀 툴툴거렸더니... 어떤 사람이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보라는 말을 해주더라고요.
마순희: 분명히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테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제 경험을 놓고 봐도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지 몰라요. 이 세상 살다 보면 어찌 속상할 일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노라면 마음 상할 일들 투성이죠. 그러나 한 번만 뒤집어 '긍정'으로 바라보면 결론이 달라지기도 하더라고요. 딱히 해결된 것은 아닌데도 속상하지는 않으니까요. 사실 저도 오늘의 주인공과 이야기 나누고서 긍정의 힘을 더 믿게 됐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경기도 한 지역에서 하수도 사업소에서 6년차 근무하고 있는 김성미 씨인데요. 성미 씨는 2004년 11월에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살다가 2010년 7월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고 하니 올해로 한국 정착 10년차가 되겠네요.
김인선: 근무지가 하수도사업소라면 일반 회사원이 아니라 공무원이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정무원쯤 되는데요. 일반 사무직업무과 해설사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성미 씨가 근무하고 있는 하수도사업소에서는 생활오수가 어떻게 정화되어 농업용수로 변하여 재사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장이 있는데요. 성미 씨는 제기되는 사무업무 뿐 아니라 하수도 사업소를 찾는 단체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해 주기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답니다. 5년 주기로 계약을 다시 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사항이 없으면 언제까지라도 근무가 가능한 공무원이랍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남한에선 평생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 인기가 좋은 직업이죠. 성미 씨처럼 번듯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탈북민을 보면 더 뿌듯하고 대단하게 느껴지는데요. 그 자리에 있기까지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해주는 여러 교육을 받으면서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다 보니 230명 교육생 중에서 컴퓨터 시험 1등을 하게 됐는데 성미 씨는 컴퓨터 시험 1등이라는 경험을 통해 나도 잘 정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한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죠.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자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하다 보니 지금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서 6년차 근무하고 있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감사하는 마음, 긍정의 마음.... 저는 머리로는 수긍이 되지만 현실에선 불쑥불쑥 화나거나 짜증나는 일들이 많아서 잘 안 되더라고요. 성미 씨는 한국에 갓 와서 그런 일이 더 많았을 거 같은데 어떻게 그 마음을 유지한 거죠?
마순희: 네, 어쩌면 성미 씨의 천성이 낙천적인 성향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쪽에서 지낼 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성미 씨의 고향은 함경북도의 한 지방 도시였습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한 성미 씨는 공장 일에 장사까지 하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내비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성미 씨에게도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미 씨의 친구 중에 중국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었답니다. 중국에 와서 몇 달만 벌어가면 한 밑천 될 수 있으니 그 돈으로 장사라도 해서 편히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중국에 간 친구들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던 성미 씨였지만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자 그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더랍니다. 결국 성미 씨는 친구의 권유대로 중국으로 갔고 그렇게 몇 달을 돈 벌어 돌아간다던 길이 몇 년이 걸렸고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한국으로의 길까지 이어졌습니다.
김인선: 중국에서 몇 년 정도 지냈다면 성미 씨도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됐을까요? 탈북여성들 상당수가 인신매매를 통해 중국 남편을 맞게 되잖아요.
마순희: 네, 성미 씨라고 예외는 아니었으니까요. 아시는 것처럼 국경을 넘는 그 순간부터 탈북 여성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신매매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었는데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나마 소개받은 남성이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흑룡강성에서 살고 있고 심성이 착하고 근면한 청년이었습니다. 성미 씨는 잘못 팔려 간 여성들이 어떻게 어려운 형편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여러 번 들어왔던 지라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도 살아보아서 잘 아는데 중국 농촌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생활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더라고요. 농사를 하면 비료 값, 농약 값, 인력 값을 모두 지불해야하고 다음해 농사를 위해 성미 씨네 부부는 또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당시엔 성미 씨네 부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농촌에서는 외국으로 돈 벌러 나가는 바람이 불었는데요. 성미 씨의 남편도 외국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선뜻 결심하지 못했습니다.
김인선: 인신매매로 맺어진 북한 여성과 중국 남성의 사이가 대부분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두 분의 애정은 각별한 것 같네요.
마순희: 그런 것 같습니다. 솔직히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탈북민 아내들이 도망치는 사례들이 드물지 않았기에 마음을 놓지 못한 부분도 컸을 거라 생각됩니다. 성미 씨의 남편은 일본으로 떠나는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도 결심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남편을 보고 성미 씨는 자신을 믿고 떠나라고 등을 떠밀었답니다. 도망가지 않을 테니 나를 믿고 마음 놓고 떠나라고, 그래야 우리 딸한테 우리와 꼭 같은 생활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성미 씨의 말에 결국 남편은 일본으로 돈벌이를 떠나고 성미 씨는 딸을 데리고 시댁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 없이 어린 딸을 키우느라 농사일을 할 수 없게 된 성미 씨는 가족과 떨어져서 힘들게 돈을 벌고 있는 남편에게 자신만 편하게 지내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늘 들었다고 합니다. 마침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던 성미 씨는 남편과 의논해 시댁에 어린 딸을 맡기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한국행을 결심했다? 어린 자녀까지 놓고 말이죠. 선뜻 이해가 안 가는데요.
마순희: 중국에 살 때 저도 많이 보아왔는데요. 남편이나 아내들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면 남은 배우자들은 집에서 자식들 키우며 허송세월하면서 남편이나 아내들이 힘들게 벌어서 보내주는 돈을 쓰면서 편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나마 가정을 제대로 유지하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힘들게 돈을 벌어 와도 가정이 깨지는 사례들도 드물지 않았거든요. 성미 씨는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았기에 남편에게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했고 시부모님들의 승인을 받은 후에 한국행을 하게 됐습니다. 웬만한 부부 같으면 신뢰가 안 갈 일이지만 워낙 서로를 잘 이해하고 목표가 같았던 부부였기에 남편도 성미 씨를 한국에 가도록 협조한 것입니다.
김인선: ‘성공시대’는 많은 탈북민들이 목숨 건 탈북 과정을 겪기 때문에 그 이후,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하는 프로그램인데, 이게 어느새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을 응원하게 되네요. 과연 가족 모두 한국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네. 물론입니다. 탈북민들의 경우 초기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친 후 6개월 후부터 여권 발급이 가능합니다. 성미 씨는 국제결혼 수속을 통해서 남편과 사랑하는 딸을 모두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성미 씨의 이야기는 한편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중국에서 만난 남편과의 사랑이 이렇게 넘치는 사례는 처음인데요. 성미 씨 부부가 한국에서도 그 마음 변치 않고 잘 지낼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