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북한 주민의 인권 보호와 증진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북한인권법이 제정된 지 5주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2일, 관련 토론식 발표회가 열렸는데요. 정치인과 변호사 뿐 아니라 일반 시민이 함께 했어요. 한국 내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북한인권에 관심을 갖고 애쓰고 있는데요. 탈북민들의 참여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개인방송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유명인이 아니어도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탈북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한 분을 소개하면 좋을 것 같네요. 제가 소개해 드릴 분은 이영화 씨인데요. 자신만의 방법으로 북한의 실상이나 탈북민의 실태에 대해서 남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큰 단체에서가 아니라 본인이 근무하는 곳을 중심으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죠. 영화 씨는 2009년에 외화벌이로 중국에 파견근무를 나갔다가 한국까지 오게 됐는데요. 외화벌이는 보통 3년을 기본으로 생활하게 되는데 영화 씨는 1년도 채 안 돼서 한국행에 성공한 겁니다. 외화벌이를 위해 떠난 것이 한국까지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죠.
김인선: 저도 북한의 많은 노동자들이 외화벌이를 위해 해외에 파견되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국외에서 활동하는 운동선수부터 건설현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등 다양한 형태로요. 보통 여성의 경우 러시아나 중국에 있는 북한식당에서 공연도 하고 식당 일도 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혹시 이영화 씨가 예술단 단원이었나요?
마순희: 아니요. 영화 씨는 북한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국어교원으로 11년간 근무한 분인 걸요. 영화 씨의 꿈은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었는데요. 아무리 열심히 근무해도 입당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부모님을 둔 다른 교원에게 입당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영화 씨의 부모님이 재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영화 씨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3년간 외국에 나가서 돈이라도 벌어 올 목적으로 2009년에 중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던 겁니다. 근무지는 중국에서도 큰 대도시인 상해였다고 하는데요. 아무리 외부와 격리된 사무실에서 근무한다고 하지만 한두 달 근무하다 보니 자본주의적인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건강이 안 좋으셨던 부모님이 영화 씨가 중국에 나간 몇 개월 사이에 돌아가시다 보니 북한으로 돌아갈 마음이 더 없어진 거죠.
또 외화벌이의 대방이 한국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 중 선교사업을 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아시는 것처럼 한국의 여러 선교단체에서 탈북민들의 한국행을 지원해 주잖아요? 운 좋은 탈북민들은 비교적 편하고 안전하게 한국까지 오게 되는데요. 이영화 씨 역시 그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중국지사에 근무한지 10개월 만에 한국행을 결심하고 2010년 2월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데요. 중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로 갔다가 다음날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한 뒤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원을 나온 뒤 바로 일을 시작했다는 분들도 있긴 한데요. 안정된 일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지속하기가 어렵거든요.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하루 일하고 일한 만큼 돈을 받는 일용직일 테니까요. 영화 씨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요?
마순희: 보통의 여성들이 자격요건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식당 일이었을 텐데요. 영화 씨의 경우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영화 씨가 출근한 직장은 바로 하나원에서 교육중인 탈북민 자녀들이 있는 근처의 초등학교였습니다. 사실 하나원 나오면서 영화 씨가 배정받은 거주지는 서울이었는데요. 근무지가 있는 초등학교는 다른 지역이었습니다. 왕복 3-4시간이 걸리는 거리라 출퇴근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런 조건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11년 간 교원으로 근무하던 영화 씨에게는 그 이상, 더 이상적인 직업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북한에서 교원을 했어도 교육환경이라든가 자격요건들이 달라서 남한에서 다시 교원을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북한에서 교사를 했었던 분들 대부분이 경험을 살려서 한국에서도 교단에 섰으면 하고 바라시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서 다른 일을 찾는 분들도 많고요. 영화 씨는 어떻게 준비가 많이 필요한 교원을 하나원 나오자마자 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남한에 와서 원하는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영화 씨 같은 분을 보면 ‘인복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익숙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을 테니까요. 영화 씨 역시 사범대학 졸업 후 줄곧 교사로만 지냈었기에 대한민국에서도 교단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사회생활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받으면서 진로상담 교사도 만나게 되는데요. 영화 씨는 교사로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교사로 근무하자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고 알려주더랍니다.
그렇지만 영화 씨는 4년 동안 다시 대학을 다니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렸고 영화 씨의 이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하나원의 진로상담 교사들은 영화 씨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기에 방법을 찾았습니다. 북한에서처럼 국어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정규 교사는 어렵지만 계약직 교사로 근무할 수는 있다며 영화 씨에게 가능한 방법을 알려주었고, 영화 씨는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하나원 교육생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계약직으로 교단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흔치 않은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영화 씨가 하나원 생활에서도 성실하고 바른 생활모습을 보이고 신뢰를 쌓았기에 하나원에서 계약직이지만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인선: 신뢰가 있으면 예상치 못한 좋은 기회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영화 씨처럼 말이죠. 그런데 초등학교 교사라면 전 과목을 다 가르쳐야 하는데, 그게 가능했을까요?
마순희: 아니요. 이영화 씨는 탈북 아이들을 전담하는 선생님으로 코디네이터라고 하는데요. 아이들의 학교적응을 돕고 학습지도부터 진로상담, 방과 후 학습, 문화현장체험에 이르기까지 탈북학생들의 생활 면면을 세심히 챙겨주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엄마처럼 세심히 챙겨주다 보니 ‘두 번 째 엄마’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토록 바라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행복감을 안고 근무를 시작했지만 영화 씨는 시작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하는데요. 북한에서나 남한에서나 영화 씨가 선 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똑같은 교단이지만 교육환경, 교육과정 등이 서로 다르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남북한 교육체계를 비롯한 전반적인 교육의 차이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니까요. 산 넘어 산이라고 어려운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방과 후 학습을 지도하다 보면 탈북학생들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남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도 함께 돌보게 되는데 ‘소통’ 대화의 어려움이 가장 컸다고 합니다.
김인선: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많은 탈북민들이 말에 관한 어려움을 겪고 있죠. 말투로 인한 오해가 생겨서 힘들었다는 말도 자주 하는데요. 탈북민들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해 없이 뜻이 통하는 ‘소통’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 영화 씨는 소통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냈을지 궁금한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