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통일사절단, 교사 이영화 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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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영화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북한에서 중학교 국어교원이었던 영화 씨는 아무리 노력해도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 번번이 좌절되면서 중국 상해로 외화벌이를 떠났습니다. 외화벌이를 하면서 접한 한국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영화 씨가 한국으로 올 수 있었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영화 씨는 중국지사에 근무한 지 10개월 만에 한국행을 결심했고 탈북민들의 한국행을 지원해주는 선교단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2010년 2월에 한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산 속을 걷고 강을 건너면서 몇 달을 거쳐 어렵게 한국까지 오는 탈북민들이 많은데 이영화 씨는 운 좋게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게다가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하고 사회에 나오자마자 북한에서처럼 교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교원이었다 해도 남한에서 교원을 다시 하려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해야 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분들도 있는데요. 교원이었던 것이 증명만 된다면 계약직 교사로는 근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영화 씨에게 그 정보를 하나원 선생님들이 알려준 거죠. 덕분에 영화 씨가 탈북교사로는 처음으로 한국의 공립학교에 배치될 수 있었는데요. 아마도 상담사선생님들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김인선: 맞습니다. 탈북학생을 전담으로 담당하는 코디네이터 선생님으로 영화 씨의 자격요건은 충분했으니까요. 실제로 영화 씨가 배정받은 학교엔 탈북민들의 자녀들이 많은 곳이라고 했었죠?

마순희: 네. 하나원에서 교육중인 탈북민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하나원 근처의 초등학교였는데요. 사실 출퇴근하기엔 거리가 다소 멀었습니다. 하나원을 수료한 뒤 영화 씨가 서울로 거주지를 배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왕복으로 하면 3~4시간 걸리는 거리지만 교단에 설 수 있다는 것이 영화 씨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근무 시작부터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똑같은 교단이지만 남북한 교육체계를 비롯한 전반적인 교육의 차이도 컸고 무엇보다 소통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김인선: 말투 때문에 소통이 어렵다고 하는데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좀 있더라고요. 특히 함경도에서 오신 분들이 소통의 어려움을 많이 호소하시던데, 영화 씨는 어떨까요?

마순희: 이영화 씨는 남한과 근접한 강원도 출신입니다. 영화 씨 역시 자신의 고향이 강원도 원산이었고 또 교육자였기에 억양이 센 함경도 출신 탈북민들에 비하면 말투나 언어 면에서는 크게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하는데요.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업을 하는데 학생들이 영화 씨의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용어들이 서로 달랐던 거죠. 예를 들어 ‘하나 더하기 둘 같기는 셋’이라고 하면 애들이 “선생님~ ‘같기는’이 뭐예요?” 라고 되묻는 겁니다. 이렇게 사소한 용어의 차이부터 교육방법, 절차 차이까지 넘어야 할 산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북한에서는 한 문제에 두 가지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비준(인증) 받은 교수안에 의한 한 가지 답만 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 여러 가지 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또 북에서는 교사가 질문하면 손부터 들어야 하는데 남한에선 자유롭게 대답하고 때론 선생님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는 모습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사인 자신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워야 제대로 수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씨는 밤을 새워가며 다음날 강의 내용을 자신이 먼저 익혀야 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또 북한에서는 매번 교수안을 쓰고 비준을 받은 후에야 수업을 할 수 있는데 교수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서는 1년 분량의 교수안을 미리 쓰고 비준을 받은 뒤에는 그대로 수업을 한다고 하더래요. 그런 줄도 모르고 영화 씨는 혼자서 안타까워했는데 동료 교사들은 오히려 영화 씨가 그런 문제조차 모른다는 것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고 해서 충격이 컸다고 합니다. 한편으론 학교에 탈북민 교사가 한 명 있는데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고 해요. 며칠 간 고민을 하다가 영화 씨는 선생님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고충을 털어 놓았더니 동료 교사들이 그런 어려움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미안해 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영화 씨는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느꼈고 ‘북한의 실상이나 탈북민들의 실태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영화 씨가 선택한 방법은 남북하나재단에서 발간하는 ‘동포사랑’ 잡지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매번 잡지가 나올 때마다 30-40권을 보내 달라고 신청했고 잡지가 도착하면 동료 교사들에게 직접 한 권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와 협의해서 북한과 탈북민들에 대해서 무료 강의를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갔습니다.

김인선: 나라를 대표해 일정한 사명을 띠고 외국에 파견되는 사람들의 무리를 사절단이라고 하잖아요. 교육 현장에서 남북 사람들의 소통에 앞장서는 영화 씨에게 통일사절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영화 씨의 노력의 결실이 나타났습니다. 근무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졌고 힘든 기색이라도 보일 때면 힘내시라며 책상에 커피 한 잔을 슬그머니 놓고 가는 동료 교사들도 생겼다고 합니다. 소통의 어려움으로 학업의 흥미까지 잃었던 탈북 자녀들의 경우 마음 편하게 대화하고, 고민을 나눌 상대가 많아지면서 수업 참여도가 좋아졌고 남북한 아이들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영화 씨는 평생을 같이 할 동반자인 사랑하는 남편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역시 교직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 한국분이랍니다.

김인선: 이영화 씨는 가정에서도 통일을 이루셨네요. 보통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가정을 이루면 문화적인 차이로 투닥거리게 되는데요. 그래도 영화 씨 부부는 같은 교육분야에서 일하니까 공감대도 많을 테고… 여느 부부와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가요?

마순희: 맞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남북한의 문화적 차이는 무시할 수 없어서 함께 산 지 거의 10년이 다 된 지금도 가끔은 티격태격 할 때도 있다고 하는데요. 탈북민들이 북한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서로 의견이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남편은 탈북민들이 북한에서 겪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을 듣고 북한은 다 그렇구나 하고 믿었고 영화 씨에게는 그것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던 거죠. 북한에 대해 정확히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잘못된 정보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바로잡아주곤 했습니다. 더구나 이런 문제들이 남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북한과 탈북민에 대한 정보나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 같은 노력이 적은 것이라 해도 탈북민이 남한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작은 실천이자 안내자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화 씨 역시 남편을 통해서 한국문화를 배워가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배움을 멈추지 않는 영화 씨는 박사학위까지 취득했고 현재는,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방과 후 학교에서 교감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강의와 학교운영, 그리고 가정일까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1인 다역을 하는 이영화 씨의 오늘보다 더 멋진 내일을 응원합니다.

김인선: 여전히 곳곳에서 개인 통일사절단으로 활발하게 지내시는 것 같네요. 영화 씨처럼 남과 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보고 듣고 소통을 하며 함께 하려는 마음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 할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