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국의 코로나비루스 대응이 전 세계의 표본이 되기까지 묵묵히 진료현장에서 자리를 지켜 주목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염자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의료진인데요. 의사나 간호사 뿐 아니라 요양보호사도 있습니다. 탈북민 중에도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분들이 꽤 많으시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탈북민들 중에도 의사나 간호사, 간호조무사, 그리고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는 분들이 꽤 많거든요. 요양보호사로 근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요양보호시설을 직접 운영하시는 분들도 많답니다. 우리 성공시대에서도 그런 분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기도 했었고요. 자신의 건강보다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해 애쓰시는 수많은 의료진들과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코로나도 요즘은 많이 호전 상태를 보이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 개인 위생도 더 철저히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성실히 동참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올해로 한국에 온지 11년차인 요양보호사 박영희 씨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동대문시장에서 재봉하는 일도 했었고 식당 주방에서도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일하면서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여 자격증을 취득했고 지금은 요양보호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거죠. 한국에서 지내는 11년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해 보면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이제야 잡은 것 같다고 영희 씨는 말했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한 번에 딱 맞는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이 일, 저 일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일도 찾고.. 또 일도 잘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동안 겪었던 시행착오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던 거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시행착오를 겪을 때마다 시련과 좌절감이 느껴져서 힘이 쭉 빠지는 경우도 많지만 그 시간이 결코 헛되진 않더라고요. 그런데 영희 씨의 경우 삶 대부분이 시행착오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영희 씨는 함경북도의 자그마한 국경도시에서 태어났는데요. 탄광마을이다 보니 졸업 후에는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노임(급여)도 못 받다 보니 영희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시장에서 국수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사 밑천인 국수를 모두 도둑맞았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영희 씨는 아버지 켠으로 친척들이 있는 중국에 가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오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두만강을 건넌 영희 씨는 두어 달 동안 중국 친척집에 살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 왔는지를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모아 준 물품과 돈을 가족들에게 전달하고는 돈 벌러 간다고 다시 중국으로 갔습니다.
김인선: 영희 씨가 북한과 중국을 무사히 오가서 참 다행이네요. 그래도 한번 성공했다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는 일은 너무 위험하지 않았나 싶어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두 번째 중국행이 영희 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친척집에 가기 전에 인신매매자들에게 잡혀 강제 결혼을 하게 되고 한족 마을에서 숨어 사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런데다 남편은 가정폭력까지 일삼았습니다. 술만 먹고 들어오면 자신이 지칠 때까지 영희 씨를 매질했는데 가죽 허리띠가 갈갈이 찢어질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인신매매로 북한여성을 데려간 남성들 중에는 좋은 사람보다 좋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여성을 돈으로 사서 살아야 하는 정도면 경제적으로 몹시 가난해서 중국여성들과는 결혼을 할 수 없는 형편이거나 지체장애가 있거나 혹은 폭력성이 있어서 정상적으로 장가를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영희 씨의 남편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김인선: 좀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으로 중국에 갔다가 이렇게 인생이 확 바뀐 탈북여성들이 많아서 들을 때마다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영희 씨는 어떻게 그 고난의 시간을 이겨냈을까요?
마순희: 네. 중국은 공안의 단속이 심해서 탈북여성에게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거든요. 영희 씨도 폭력이 심한 남편을 피해 도망쳤지만 중국 공안에게 잡혀 북한으로 가게 됐는데요. 이런 일이 무려 다섯 차례나 반복됐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영희 씨의 오빠가 구제해줬는데 오빠를 더는 힘들게 해선 안 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북한에선 못 살겠더랍니다. 결국 영희 씨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2006년 중국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합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회사에 취직을 했는데요. 직원들을 위한 식당이 있어서 영희 씨는 주방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방 일의 경우 소개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탈북여성들이 가장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중국 공안이 단속을 와도 한국회사 사장들은 대체로 우리들을 보호해 주기 때문인데요. 영희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방 일을 하면서 돈도 벌었고 그동안 한족 동네에서 숨어 사느라 몰랐던 세상 물정도 알게 됐습니다. 탈북민들이 어떻게 한국에 가서 잘 살고 있는지도 그때 처음 알게 됐다고 하는데요. 영희 씨는 회사에서 받은 노임(급여)을 차곡차곡 모아서 2009년 드디어 한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김인선: 영희 씨가 한국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 본 후에 요양보호사가 됐다는 말을 하면서 탈북과정, 중국에서 지낸 이야기까지 길어졌는데요. 정착이야기를 듣기 전에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폭력에 노출된 탈북여성들인데요. 북한과 중국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한국에선 1998년부터 ‘가정 폭력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법으로 가정폭력을 다스리고 있거든요. 과거에는 각 가정문제라고 여겨서 쉽게 개입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가해자는 처벌받을 수 있고 주변에서 신고를 해주기도 해요. 탈북여성들이 이 점은 꼭 알았으면 좋겠네요.
마순희: 네. 맞아요. 실제로 우리 북한 여성들은 그런 부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든요. 남한에서는 점차 인식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북한은 아직 그렇지 못 한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가정폭력에 반대하지만 여전히 남의 집 가정사라고 여기기 때문에 가정폭력을 알아도 신고하지는 않거든요. 더구나 가부장적인 북한에서는 여성이 매를 맞아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는 식으로 여기기 때문에 여성들은 보호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북한의 가부장적 문화는 한국에 와서도 이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남북하나재단에서 근무할 때에도 탈북민 가정의 가정폭력 피해신고 전화를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거든요.
하지만 한국에서 몇 년을 살게 되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가정폭력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교육받으니까요. 민간단체에서 혹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가정폭력 예방교육을 많이 하고 있어서 직장인, 전업주부 모두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에는 여성쉼터도 있어서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지낼 수 있는 시설도 있잖아요. 탈북민의 정착지원과 생활지원을 하는 남북하나재단에서도 탈북여성들을 위한 여성쉼터를 운영하는 곳이 있습니다. 긴급 상황이 있을 때 연락할 수 있는 전화도 있어서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더라고요. 중국에서도 그런 제도가 있으면 좋겠지만 중국에서 지내는 탈북여성들은 숨어 살아야 하는 불법체류자 신세다 보니 어디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중국에 와서는 모든 게 운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탈북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목숨 걸고 탈출하는 것도 우리들의 운명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인선: 그래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알리는 개인과 단체가 많은데요. 그들 중에는 탈북민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성공시대’ 주인공들도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일을 잘 하면서 인정도 받고 탈북민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니까요. 남한에서 잘 정착해 나가는 성공시대 주인공이야말로 곳곳에서 활동 중인 인권운동가가 아닐까요? 요양보호사 박영희 씨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한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