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거리마다 개나리나 벚꽃이 활짝 핀 모습이 봄의 절정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때쯤이면 계절만큼 상큼하게 변신을 하고 싶은 게 여자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오늘의 주인공을 만난다면 멋지게 변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분인지 소개 좀 해주세요.
마순희: 저도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고 오면 보기 좋게 변신을 하거든요. 이젠 반백이 훨씬 넘는 흰 머리칼을 염색하기도 하고 파마나 드라이, 그러니까 건발하는 것만으로도 확 달라지니까요. 오늘의 주인공은 대구시에 있는 ‘나르샤 미용실’ 원장인 김민선 씨입니다. 민선 씨는 2011년 딸과 함께 대한민국에 입국했는데요. 어려운 고비들을 수 없이 극복하고 2016년 자신의 미용실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제가 민선 씨를 찾아 갔을 때에는 여름이었는데 미용실에 들어서자마자 더위가 한결 가시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미용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중형 냉장고가 눈길을 끌었는데요. 미용실을 찾는 고객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게 골라서 마실 수 있도록 갖가지 커피와 음료들이 차 있었습니다. 익숙하게 음료수를 꺼내 먹는 손님들의 모습에서 단골손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인선: 물론 음료수 때문에 손님이 더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손님을 위하는 민선 씨의 세심한 배려 때문에 단골손님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미용 기술이 좋아야 고객이 찾게 되거든요?
마순희: 그렇죠. 이미 자신의 미용실을 내기 전에 다른 미용실에서 근무할 때부터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단골손님도 많이 늘었다고 했는데요. 제가 찾아 간 날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었습니다. 사실 민선 씨는 북한에서도 미용을 했던 전문가였습니다. 평양에서 전문 미용기술을 배운 미용사였던 거죠. 그래서 한국에 정착하면서 힘들더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자신의 경력을 살리는 미용사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선 자격증을 취득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미용전문대학에 등록했는데요. 100여명의 수강생들과 함께 미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힘든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 미용 기술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배우는 미용 기술은 차원이 다르더랍니다. 파마하는 기계도 한국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던데 북한에서는 거의 손으로 직접 말아서 하거든요. 염색약도 남한에는 색상도 다양하고 제품도 다양한데 북한에는 흰머리를 감추려고 하는 정도의 염색약 정도밖에 없으니까 몇배로 더 외우고 알아야 했던 겁니다.
민선 씨가 처음에는 북한에서 미용기술을 배운 기초가 있어서 금세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기대를 했다는데 말처럼 쉽지 않았던 거죠. 염색 약 색상에서부터 외래어가 너무 많아서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수첩에 일일이 적어 짬 시간에도 쉬지 않고 단어를 외웠고 기술을 익혔지만 자격증을 취득하기는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용사가 아니더라도 어려서부터 미용실을 이용했던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일상적인 용어로 알고 있는 단어들도 민선 씨에게는 하나하나 외워야 할 새로운 단어들이었으니까요. 민선 씨는 필기시험을 일곱 번 만에 합격하고 실기 시험도 두 번을 쳐서야 합격하게 되었답니다. 미용사 자격증을 받던 그날의 감격을 민선 씨는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어느덧 6년차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술도 좋고 사교성까지 뛰어나서 2016년부터 문을 연 민선 씨의 미용실은 언제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김인선: 그런데 아까 6전 7기라고 했잖아요. 저 같으면 6번 실패하는 동안 그만두고 싶었을 것 같아요.
마순희: 저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워낙 당차고 열정적인 민선 씨는 주저앉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고 해요. 비록 내가 북한에서 와서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생소하긴 하지만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내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열심히 배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버스가 끊긴 텅 빈 버스정류소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사실 머리 모양이라는 게 최신 유행에 굉장히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민선 씨는 따라가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마순희: 네. 안 그래도 항상 수첩에 미용 용어들을 적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기도 하고 몇 번씩 동작을 곱씹어 연습하기도 하면서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고 해요. 그럴 때마다 지금 주저앉으면 나만 바라보는 딸 앞에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더더욱 마음을 다잡았답니다. 미용 기술면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에는 미용학원 교사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답니다. 기술뿐 아니라 외래어 때문에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선생님들의 지지가 있었다는데요. 모르는 미용 용어를 질문하면 북한에서는 확스라고 하죠, 팩스로 용어들을 보내주기도 하고 모르는 것이 있어서 질문하면 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반복해서 알려주면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움을 줬답니다. 민선 씨는 그때 선생님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자신도 없었을 거라면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노력이라면 민선 씨는 매 주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고 합니다. 복지관이나 시설에 찾아가서 어르신들의 머리를 해주는 봉사였는데요. 자신의 노력으로 예쁘게 단장된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는 어르신들을 보며 내가 누구에겐가 도움을 줄 수 있고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됐죠. 그러면서 자신감도 나날이 더 자라게 되었다는 겁니다.
김인선: 그런데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봉사까지 하려면 혼자 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마순희: 네. 저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제가 찾아 갔던 날 미용실에는 또 한 명의 미용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미용정보고등학교에 다니는 민선 씨의 딸이었습니다. 민선 씨의 딸이 미용실에 서기까지는 깊은 사연이 있었는데요. 딸은 북한에서도 손꼽히게 공부를 잘 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로서는 반 애들을 따라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딸의 얘기를 듣고 민선 씨는 차라리 엄마랑 같이 미용을 해보면 어떻겠는지 의향을 물어봤다고 하는데요. 평소에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미용실에 와서 즐겁게 청소도 하고 손님들의 시중도 들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던 딸인지라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래요.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한 딸이 미용정보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방과 후에는 늘 엄마의 미용실에서 실습 겸 일손을 도왔다고 합니다.
김인선: 착한 딸이네요. 이제는 원장님과 디자이너 선생님으로 같은 길을 걷게 된 동료가 된 셈이네요?
마순희: 그렇죠. 미용사의 길에 들어선 딸이 지금은 민선 씨의 유력한 조력자가 됐는데요. 미용실에서도 절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김선생님, 이거 좀 도와 주실래요?’ 하더라고요. ‘김선생님, 김선생님’해서 저는 처음에는 딸인 줄 몰랐답니다. 얼마 전에 통화를 했더니 지금 그 딸은 미용정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있는 큰 미용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더 많이 배워서 엄마랑 함께 미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톱 관리나 화장, 속눈썹 연장 등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해주는 미용실을 꾸리는 것이 꿈이라고 한답니다. 두 모녀가 그렇게 한 분야에서 서로 도와가면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현장에서 실력을 쌓아가다 보면 그 꿈이 멀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대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김민선 씨의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딸과 함께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성공은 누구나 이룰 수 있지만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탈북민들의 성공과 그 기준에 대해 들어보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나르샤 미용실 원장, 김민선(가명)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