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살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놀라운 일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요. 관계가 전혀 없을 것 같은 일들이 삶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지난 주 소개했던 박지윤 씨처럼요. 지윤 씨는 두 번의 북송과 탈북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한국 입국 후 치료를 목적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운명처럼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습니다. 우연 같지만 우연 같지 않은 운명적 만남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마순희: 네. 충분히 될 것 같습니다. 박지윤 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지내는 동안 환자들을 보살피는 간병인이나 간호조무사들의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막연하게 ‘나도 저런 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도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윤 씨는 북한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했기에 지원자격이 충분했습니다. 건강을 되찾은 박지윤 씨는 바로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를 해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기초의학이라고 하지만 기본이 부족했기에 3개월 만에 한계를 느끼게 됐습니다. 저녁 시간엔 부족한 공부를 더 해야 했지만 지윤 씨는 24시간 운영되는 상점에서 부업을 하면서 학원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김인선: 전문 의료지식이 필요한 간호사와는 달리 기본적인 의학지식으로 간호사를 보조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조무사는 젊은 탈북민들도 꽤 도전을 하더라고요. 탈북민들은 2014년부터 간호조무사 교육과정도 전액 국가에서 부담해주고 있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박지윤 씨는 우선, 모든 과정의 기본인 컴퓨터 공부를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비 전액 지원이 가능했기에 비용에 대한 부담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3개월 공부하면서 자격증을 취득하면 간호조무사로 취업하기가 쉬운 직업이라고 해서 무작정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지윤 씨는 잠시 컴퓨터 공부를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컴퓨터를 배워야만 간호조무사 학원의 공부를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조급해 하지 않고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갔습니다. 컴퓨터 학원을 졸업한 지윤 씨는 다시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보다는 이해가 더 잘됐고 컴퓨터를 알고 보니 진도도 원만하게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은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로 난생처음 들어 보는 의학용어들과 씨름하면서 밤낮을 이어 공부를 이어갔고 740시간의 실습을 거쳐 국가고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지윤 씨의 피타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간호조무사 국가자격증 시험에 단번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자격증을 갖추면 간호조무사로 일할 수 있는 곳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선택권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네마다 있는 일반 개인병원을 비롯해서 치과, 산후조리원, 노인요양원 등 다양해서 취업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니까요. 실제로 박지윤 씨는 자격증을 취득한 후 2011년 경기도의 한 지방도시의 여성병원에 취직이 됐습니다. 근무부서는 산모와 갓난아기들을 돌봐야 하는 산후조리원이었다고 하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아이를 유난히 사랑하던 그녀에게는 어쩌면 천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인선: “농사 지을래? 아기 돌볼래?”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그 질문에 차라리 농사를 짓겠다고 말하게 된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아이를 돌보는 일이 고되다는 말이거든요.
마순희: 맞습니다. 처음 지윤 씨에게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낳은 적도 키운 적도 없기에 모든 게 서툴렀고 말투도 달라서 심리적으로 위축이 됐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돌보는 것도 열악했던 북한에 비하면 현대적인 의료장비는 물론이고 분유며 기저귀며 쾌적한 시설까지 조건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자신이 노력하고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들이 한 가지 일을 하면 나는 열 가지 일을 해야 따라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했다는데요. 함경도 특유의 말투를 교정하기 위해서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의 말을 따라해 보며 말투를 고쳐 나갔고 짬 시간에도 쉬지 않고 책을 보는 등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제기되면 네 일, 내 일을 가리지 않고 항상 자신이 먼저 노력하는 그의 성실함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지윤 씨는 어느 순간부터 병원에서 존재감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인선: 존재감을 느끼며 일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지윤 씨가 가진 자긍심이 대단하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지윤 씨에게는 스스로가 그 존재감을 느끼게 된 사연이 있다고 해요. 산후조리원에서 근무한지 3년쯤 됐을 때 지윤 씨는 중국에 살고 계시는 연로하신 고모님을 찾아뵈어야 할 사정이 생겼던 것입니다. 자신이 탈북해서 중국에 왔을 때 누구보다 사랑해 주고 보살펴 주셨던 고모님이셨고 지윤 씨의 한국행을 주선해 주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연로하시다 보니까 생전에 지윤 씨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연락이 온 거죠. 일을 그만두느냐, 아니면 고모님을 뵈러 갔다 오는 것을 포기해야 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지윤 씨는 중국행을 선택했습니다. 부모님 같은 고모님의 마지막을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병원 측에 전하고 아쉽지만 사직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병원에서는 한 달 정도 시간을 줄 테니 걱정 말고 중국에 갔다 와서 다시 일하라고 허락을 해 주었답니다. 그동안 자신이 열심히 근무한 데 대한 보답인 것 같아서 정말 마음이 뿌듯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지윤 씨는 후회 없이 고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고 약속대로 다시 같은 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평균적으로 간호조무사 1명당 신생아 3.5명을 돌봐야 합니다. 8시간 이상 아기를 돌보면 팔목 인대가 늘어나기도 하고 서 있는 시간이 많아서 다리도 붓고 힘들 텐데 지윤 씨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배려해 준 병원이기에 열심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열심히 근무한 것만큼 급여도 높기에 더 바랄 것 없는 직장이라고 합니다.
김인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만큼 뿌듯한 것도 없을 것 같긴 한데요. 예전엔 한번 몸담은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여겼지만 이젠 능력과 경력을 살려 회사를 옮기고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됐거든요. 탈북민들도 예외는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박지윤 씨는 지금도 그 산후조리원에서 장기근속을 하고 계실까요?
마순희: 결론적으로는 이직을 했습니다. 이직의 이유가 너무도 안타까웠는데요. 한국의 출산율이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하기도 했지만 지윤 씨를 통해 체감이 됐습니다. 산후조리원이 운영난으로 문을 닫게 돼서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옮기게 됐다고 하는데요. 박지윤 씨는 산후조리원에서 6년 넘게 장기근속을 한 뒤 2016년부터 지금까지 노인요양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5년째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비루스로 감염병 예방과 차단에 더욱 신경 쓰고 엄격하게 방역지침을 준수해야 하고 휴가도 없이 일해야 한다는 점이 힘들지만, 코로나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간호조무사 소식을 접할 때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일하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일을 하게 된다는 박지윤 씨입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분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지윤 씨,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지윤 씨의 말처럼 좋은 생각을 가지고 더 밝은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김인선: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박지윤 씨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즐겁게 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긍정의 마음으로 웃으면서 일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