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전 세계 코로나 누적환자가 4월 22일 기준으로 25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남한에선 최근 확진자가 한 자릿수까지 줄었는데요.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지난 20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조금 완화했습니다. 그동안 제한했던 집단시설의 운영을 일부 허용한 건데요. 하지만 감염 위기 경보가 낮아진 건 아닙니다. 언제든 집단감염의 위험은 남아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남한 전국의 초. 중. 고등학교는 온라인으로 개학을 했고 학교에 가지 않고 각자 집에서 인터넷 화면으로 선생님과 만나는 원격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덕분에 요즘 전국의 선생님들! 카메라 앞에서 수업을 하고 인터넷 상에서 학생들과 대화하느라 굉장히 바쁘다고 하는데요. 탈북민 중에도 이런 분이 있을까요?
마순희: 그럼요. 학교에서 근무하는 탈북민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그 중에는 제가 알고 있는 분들도 여러 명 되는데요. 제가 재단에서 근무하던 2014년에는 탈북민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14명이었는데 해마다 조금씩 수가 늘어나서 2020년 현재는 21명의 탈북민 코디네이터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강선희 씨는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코디네이터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선희 씨 역시 요즘은 온라인 강의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김인선: 북한 청취자 여러분은 코디네이터가 뭔가 싶으실 텐데요. 남한에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은 ‘중간에서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게 돕거나 연출하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상품기획부터 음식이나 옷 등의 제품, 병원 일까지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더라고요. 강선희 씨처럼 학교에서 일하는 코디네이터는 탈북 학생들의 교육활동을 돕는 거죠.
마순희: 맞습니다. 사실 저도 예전부터 알고 있던 강선희 씨를 통해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됐는데요. 남한의 각 학교에는 다양한 형태로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쉽게 말해 보조 선생님들이 있잖아요. 진로상담 선생님, 마음 자람터 선생님처럼요. 이렇게 호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학생들이 학교에 잘 다닐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코디네이터 강선희 씨 같은 선생님이 필요한 이유는 탈북민들을 남한 사람과 분리해서 지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사회통합형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탈북학생들이 일반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부터 통일부에서는 ‘탈북민이 15명 이상인 학교에 교사 출신 탈북민을 우선적으로 코디네이터로 배정하고 탈북학생의 학교 적응을 돕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교원이었다 해도 남한에 와서 똑같은 교사로 일하기는 쉽지 않았는데요. 이제는 코디네이터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거죠. 강선희 씨처럼 탈북 코디네이터는 탈북학생을 전담하고 있는데요. 전담 코디데이터는 일반 학교에 다니는 어린 탈북 학생들이 학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 학업 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 학교생활에도 잘 정착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요. 교육청 소속의 전담 교사라고 합니다.
김인선: 사실 아이들과 함께 온 탈북민들이 제일 걱정하는 게 바로 교육문제거든요. 한국에 오자마자 채 적응도 하기 전에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야 하는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강선희 씨처럼 북한 출신 선생님이 탈북 자녀들 곁에 있다면 훨씬 든든할 거 같네요.
마순희: 네. 선희 씨 역시 아이가 있는 엄마이기에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챙기는데요. 선희 씨의 경우에도 딸이 원하지 않아서 함께 한국에 오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판단으로 한국으로 온 탈북자녀들을 보면 선희 씨는 딸 생각이 났고 ‘내 아이도 한국에 함께 왔더라면 저렇게 힘들어했겠지’ 하며 공감이 됐습니다. 그래서 더 아이들을 보듬을 수 있었던 거죠. 선희 씨는 지금 누구보다도 아이들에게 든든한 선생님이지만 정착초기에는 여느 탈북민처럼 불안과 걱정으로 힘든 시절을 겪었다고 합니다. 선희 씨가 한국에 입국한 것은 2010년이었는데 처음 배정받은 아파트에서 고독감에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초기 정착금으로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사야하는데 선희 씨는 무기력하게만 있었습니다.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방에 짐 가방도 풀지 않고 있는데 선희 씨네 집으로 정착도우미 봉사자들이 찾아 왔습니다. 집안일도 도와주시고 생활용품도 지원해 주시더래요.
무기력하게 있는 선희 씨를 진심으로 살펴주는 그분들의 모습에 점차 마음을 다잡아 나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저는 선희 씨가 한국생활 초반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해됩니다. 자신은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한문교원으로 근무했었기에 한국에서도 똑같이 교사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교사를 했었던 학력이나 경력은 인정이 되지만 남한에서 예전처럼 똑같은 교사를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탈북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김인선: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이 선희 씨의 무기력증을 벗어나게 해준 거네요. 그런데 교사 경력을 인정받았다 해도 코디네이터를 하려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있잖아요. 기본적인 학력과 경력뿐 아니라 컴퓨터 활용능력은 물론이고 남한 교육활동에 대한 이해도도 있어야 하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한국의 교육시스템도 달랐고 용어도, 말투도, 컴퓨터 활용기술까지 선희 씨는 모든 게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전기가 잘 공급되지 않기에 일반인들은 컴퓨터를 접하기 힘들었고 교사인 선희 씨도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을 선희 씨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왔을 때 44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코디네이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짬짬이 컴퓨터를 배웠고 탈북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몇 년 후에는 북한대학원 사회문화언론과에 입학해 한국의 사회문화 공부를 했고 더 많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다가 2014년,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전담 코디네이터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역시 학구파는 다른 것 같네요.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대학원까지 가서 공부하시고, 북한에서도 그냥 교원이 됐던 건 아닌 거 같은데요.
마순희: 공부는 기본적으로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요. 선희 씨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북한에서 그렇게 평탄한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더라고요. 선희 씨의 아버지는 남한 출신으로 6.25전쟁 때 징용돼 북으로 들어가신 분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다 보니 북한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선희 씨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고 하는데요.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자주 말했던 한국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선희 씨는 2009년 탈북해 2010년에 한국에 입국하게 됐는데요. 막상 오고 나니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리기도 했고 우울증을 앓기도 했답니다.
선희 씨의 초기정착이 힘들었던 것처럼 많은 탈북민들이 처음 한국에 와서는 우울증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됩니다. 아무리 한국이 좋고 살기 편하다고 하지만 두고 온 식구들과 고향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정착도우미들이 큰 도움을 주는데요. 선희 씨의 경우에도 가장 어려울 때 정착도우미 분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그분들 덕에 무기력과 우울증을 극복한 선희 씨는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고 2014년부터는 탈북민들로 조직된 하나봉사단의 초대회장 업무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강선희 씨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기까지 정착도우미들의 힘이 컸던 겁니다.
김인선: 남한에서는 2005년부터 정착도우미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요.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나온 탈북민에게 남한사회 적응에 필요한 전반적인 것들을 알려주고 도움을 주고 있어요. 코디네이터인 선희 씨도 탈북 학생들에게 정착도우미와 같은 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탈북 학생들에게 선희 씨는 어떤 선생님인지 다음 시간에 계속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