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물을 파라! 회사원 김소영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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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지난 25일에 열렸던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소식이 연일 화제입니다. 미국 최대의 영화상이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손꼽히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4세의 배우 윤여정 씨가 미국에 정착한 한국 이민자의 얘기를 담은 영화 ‘미나리’로 연기상을 받았는데요. 한국 배우 최초로 연기상을 받은 윤여정 씨는 ‘그저 하던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주인공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55년간 묵묵히 연기라는 한 우물을 파온 배우라서 할 수 있는 말인 거 같은데요. 요즘엔 이렇게 꾸준히 한 우물을 파서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가 꽤 들리더라고요. 탈북민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윤여정 님과 비교하면 길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우리 탈북민들 중에도 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공시대 주인공으로도 소개를 했었는데요. 어린 시절 탁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한국에 와서 이루어낸 친구가 제일 먼저 생각납니다. 북한에서 지역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탁구 실력은 좋았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선수단에 뽑히지 못했고 고난의 행군시기에 소녀가장이 되면서 중국으로 건너간 친구인데요. 한국에 와서 지내면서 까맣게 잊고 살던 탁구에 대한 열망을 안고 다시 선수생활과 코치생활, 북한에서는 탁구지도원이라고 하는데요. 그 코치생활까지 쭉 이어나가고 있는 유명한 친구랍니다. 1991년 세계선수권 대회에 최초의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해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던 현정화, 이분희 선수의 경기를 보고 탁구의 꿈을 키웠기에 탁구인생 20년이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 와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꾸준히 일해 성공한 분의 이야기도 많았는데요. 10년 이상 장기근속을 하고 있는 그분들 역시 한 우물을 잘 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도 마찬가지인데요. 북한에서는 전업주부로 딸을 키우며 살았지만 한국에 와서는 직장인으로 한 회사에서 13년 넘게 근무한 김소영 씨입니다. 평안북도 태생으로 올해 나이 57살인 소영 씨는 어렵고 힘든 일은 많았지만 살면서 ‘힘들어도 한 우물을 파면 뒤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합니다.

김인선: 수많은 기술 중에 성공으로 가는 기술이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꾸준함입니다. 꾸준함을 이길 재주는 없기 때문에 최소한 10년 동안 한 우물을 파보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하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말도 이젠 옛말이 됐어요. 우물이 한 곳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적당히 파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딴 곳을 파야 한다는 겁니다. 직장생활 역시 한 직장에 오래 있는 것보다 능력과 경력을 살려서 회사를 옮기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됐는데요. 탈북민들도 이런 사회적인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소영 씨는 예외인 것 같은데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마순희: 소영 씨도 처음부터 한 우물을 판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여기기까지 김소영 씨에게도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으니까요. 소영 씨는 딸이 세 살 나던 해에 남편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고 시댁에 얹혀살다가 1998년 중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보려는 마음으로 처음 북한을 떠나봤다는데요. 중국에서 한 주일 정도를 지내면서 중국에서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간 소영 씨는 다섯 살 어린 딸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에 비하면 지내기에 나아보였던 중국생활이지만 소영 씨는 신분도 불안정하고 딸의 미래를 위해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중국 공안에 잡혀 2년간의 감옥생활의 고초를 겪게 됐습니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소영 씨는 그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냈고 딸과 함께 2006년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하지만 정착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탈북민의 정착을 지원하는 하나센터나 전문상담사도 없던 때였거든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한국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는다 해도 배정받은 거주지로 오게 되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주 드나들게 되는 곳을 찾아갈 수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등의 원하는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탈북민의 정착을 도와주는 봉사자는 대부분 남한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잘 해줘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생기기도 했는데요. 탈북민들에게 특히 어려운 것은 일상생활에서 외래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거든요. 지역사회 적응을 도와주는 남한 정착도우미에게 매번 물어보면서 알아갈 수도 없었기에 소영 씨는 늘 인터넷으로 모르는 단어나 가게 간판들을 검색해 보면서 하나하나 알아 나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지역사회에 먼저 정착한 탈북민이 하나센터와 주민센터에 배정돼 새로 온 탈북민 후배들을 돕고 있는데요. 사회복지사 자격증 등 일정 자격요건을 갖추고 탈북민 전담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어서 초기정착 탈북민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남한 상담사분들도 잘 해주시고 도움을 주지만 아무래도 같은 탈북민이면 좀 더 친근하고 가깝게 여겨지는 면이 있으니까요.

김인선: 맞습니다. 그래서 한국정부에서도 탈북민이 탈북민을 지원하고 돕는 일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는데요.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탈북민 전문상담사들이 배치됐습니다. 상담사들은 탈북민들이 일상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요. 일자리를 찾는데도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취업에 성공하려면 개인의 적극성이 필요한데요. 소영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소영 씨는 탈북민 모임에 나가는 등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렸던 것 같습니다. 탈북민으로 구성된 예술단에서 함께 활동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었다고 하는데요. 북한에서 선전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소영 씨였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나 춤 같은 공연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연 일정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안정된 일자리는 아니라는 생각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소영 씨에게는 어린 딸도 있었기에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일터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예술단을 나와서 처음 시작한 일은 지역의 한 상점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힘들지도 않았고 재미도 있었지만 4대보험이 안 되는 일용직이었기에 소영 씨는 좀 더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인선: 맞아요. 4대 보험은 근로자가 법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회보험제도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게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다가 다쳐도 회사와 사회로부터 각종 보장을 받을 수 있고 고용도 안정적이라 4대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을 선호하게 되죠.

마순희: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 탈북민들도 정착 초기엔 당장의 경제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일용직이나 짧은 시간 근무하는 부업을 선택하지만 어느 정도 지내는 게 익숙해지면 일자리를 찾을 때 4대 보험 적용 여부를 확인하게 됩니다. 김소영 씨 역시 조금 지나면서 4대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회사를 찾게 됐습니다. 때마침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탈북민을 우선으로 뽑는 4대보험이 적용되는 회사가 있다며 소개해줬답니다. 그렇게 소영 씨는 사회적 기업인 지금의 종이상자 제조회사에 입사하게 됐고 한 우물을 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사회적기업은 지역사회에 공헌하거나, 사회적 약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사업에서 발생한 이익을 취약계층을 돕는데 사용하는 기업들을 말하는데요. 소영 씨가 근무하는 회사도 그 중 한 곳이네요. 어떤 회사이기에 소영 씨가 한 우물을 파야겠다고 다짐을 했을지 궁금한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갈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