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진도오리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남진 씨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볼게요. 남진 씨는 북한에 있을 때 장사 수완이 좋아서 다른 주민들보다 먹고 사는데 어려움은 적었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를 보내면서 자식들의 장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오로지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선택한 한국행이었는데요.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더구나 남진 씨 나이가 그때 40대 후반이었으니까 무엇을 새로 배워서 시작하기도 어려운 나이였지요. 40대 후반의 남자가 한국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시작하는 일마다 잘 되기는커녕 돈만 까먹게 되니 밖으로 나가기도 싫고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겪기도 했습니다. 텔레비전만 보며 무기력하게 살았는데요.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게 되고 비교적 쉽게 느껴지는 농사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살초제를 치지 않고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북한에서처럼 호미로 김을 매면서 힘들게 농사를 지었지만 수확량이 많지 않았습니다
무공해 농사를 지으면 잘 팔릴 거라는 생각에 농약도 치지 않고 비료도 좋은 걸로 치면서 오이와 옥수수 농사를 지었는데 결과는 대 실패였습니다. 남진 씨는 결국 1년 만에 투자금을 모두 날리게 되면서 전국을 떠돌며 가축사육을 배우게 됐습니다. 소도 키워보고, 돼지도 키워보고, 염소도, 개도 키워 보았습니다. 그렇게 남진 씨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축들을 키워본 후에 오리를 키우겠다고, 오리농장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 겁니다. 생육기간이 40일이라 회전율도 빠르고 승산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라는데요. 오리는 병에 걸리기 쉽기에 축사는 바람이 잘 통하는 바닷가 산등성이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그런데 오리농장을 하려면 자금과 농장부지를 마련하는 게 문제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그래서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오리농장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오리농장입니다. 당시 그곳은 오리농장이 아니라 태풍에 허물어져서 흡사 파철더미처럼 철근이 얽히고설킨 모습은 딱 폐허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진 씨는 그곳에서 오리농장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파철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저렴한 편이라 그곳을 사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은 모두 사기를 당하는 것 같다면서 한결같이 말렸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아니,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춘 오리농장에서 일을 시작해도 성공여부가 명확지 않은데 폐허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오리농장을 시작하겠다니요. 배짱이 좋은 건지,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모르겠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김남진 씨는 자신이 직접 모든 시설들을 고치고 수리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하면 잘 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렴한 가격으로 오리축사를 산 남진 씨는 발품을 팔고 노력으로 조금씩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고 하는데요. 주변의 고물상들에서 전화만 오면 일을 하다가도 그 자리로 1톤 트럭을 몰고 가서 실어왔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남진 씨네 첫 번째 오리사를 보면 시설물들 크기와 모양이 다 제각각이었습니다. 농장을 번듯하게 만들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다고 하는데요. 모든 것을 인력을 쓰지 않고 오직 남진 씨 자신의 힘으로 해 나간 거죠.
김인선: 하지만 그렇게 직접 수리와 보수를 하더라도 오리도 사야 하고, 돈이 많이 필요했을 텐데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아무리 제 손으로 모든 것을 하다고 해도 투자비용은 역시 문제였습니다. 아내가 서울에서 돈을 벌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동안 부부가 한 동네에 살면서 이웃 간에 서로 잘 지내다보니 있는 돈들을 모두 털어서 조금씩이라도 도와주었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탈북민들의 정착과 생활안정을 지원하는 남북하나재단에서 영농자금을 지원해 주는 사업이 있었는데요. 그 지원금이 오리사를 일으켜 세우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두고두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김남진 씨를 언제나 지지해주는 건 부인이죠. 지원금으로도 부족한 자금은 부인이 여기저기서 빌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매월 붓는 적금을 깨서 자금을 보태주신 동향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쉽지 않은 일인데... 김남진 씨가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와 신용이 참 좋았나 봐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부부는 누구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솔선수범으로 도와주기도 하고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등 동네에서도 회사에서도 신뢰가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김남진 씨 부인은 탈북과정에서도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 쉽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떠돌던 꽃제비 아이들 8명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서 자비로 수속 작업을 진행해 함께 한국으로 데리고 입국했을 정도니까 얼마나 신뢰가 좋겠어요. 그렇게 남북하나재단의 영농정착지원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되어 2013년 7월에 드디어 첫 아기오리를 회사로부터 입출 받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김남진 씨는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니까 오리농장 일은 순탄하게 잘 됐으면 좋겠는데요. 맘에 걸리는 게 농촌이 외부인들에게 텃세가 심한 편이라는 거죠.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탈북민들 중에도 농촌에 귀농을 갔다가 텃세를 못 이겨 되돌아오신 분들도 여럿 되거든요. 남진 씨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리사를 할 수 없다고 온 동네에서 회의를 하기도 하고 당장 중지하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남진 씨는, 오리를 키우게 되면 오리 변은 어떻게 처리하고 하수구는 어떻게 처리한다는 등 구체적인 설명들을 다 해 드리기도 했답니다. 거기에 사교성이 많은 부인이 적극적으로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서 커피도 대접하고 살갑게 대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해 나가고 있어서 별 문제없이 오리사를 운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싱싱한 남새나 과일 같은 것들을 놓아주고 지나가는 분들도 있다는데요. 가끔 아침에 자고 깨나면 문 앞에 있는 거죠. 남진 씨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데요. 오리가 40일이면 출하가 되는데 제 기준에 못 미쳐서 출하하지 못하는 오리들도 좀 남아 있잖아요. 그 오리들을 며칠 더 키워서 동네 어른들에게 그대로 나누어 드리기도 하면서 서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김인선: 주민들과 잘 지낸다고 하니까 이제는 오리만 잘 키우면 되겠네요.
마순희: 네. 오리도 충분히 잘 키우고 있답니다. 그래서 출하하는 오리를 거두어 가는 회사에서도 오리를 잘 키웠다고 인정을 해주는데요. 사실 오리를 키우면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업체에서 나와서 무게 같은 것들을 다 달아보고 오리의 위생 상태나 기준에 적합해야 가져가거든요.
김인선: 그 꼼꼼한 검열을 다 통과했다는 말이네요.
마순희: 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오리를 키우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담당자가 ‘다음에는 출하하자마자 바로 오리새끼들을 입양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정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김인선: 한 마디로 믿고 맡기겠다는 얘기군요.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었겠어요. 김남진 씨의 당시 기분이 저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시작한 오리농장이 자리를 잡아가고 성공의 맛을 보기 시작한 김남진 씨인데요. 오리농장을 시작하면서 지인들에게 돈도 빌리고 꽤 많은 빚이 있었어요. 남진 씨가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하는 이유기도 할 텐데요.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을 기약합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