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코로나비루스로 전 세계가 경제위기라고 할 정도로 힘들어진 요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의 얘기가 뉴스에서 전해지면 더 훈훈하게 느껴지는데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기업 아닐까 싶어요. 사회적 약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주민들을 돕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을 말하는데요.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는 탈북민들도 많습니다. 지난주 소개했던 김소영 씨가 그렇죠?
마순희: 맞습니다. 사회적기업에서는 탈북민의 자립을 돕기 위해 탈북민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는데요. 김소영 씨가 근무하는 회사도 그 중 한 곳입니다. 소영 씨가 근무 중인 회사 외에도 우리 주변에는 사회적기업을 많이 찾아볼 수 있고 또 그곳에서 일하는 탈북민들도 쉽게 만날 수 있는데요. 저희 동네에도 ‘청정 메아리’라는 사회적기업이 있습니다. 탈북여성 사장이 코다리찜 식당을 운영하면서 냉동 명태를 가공하는 황태덕장 작업까지 겸해서 할 수 있는 사회적기업으로 만든 곳인데요. 지역 주민들과 탈북여성들이 그 회사에 취업해서 식당에서 일하거나 명태가공품을 판매하기도 하고 또 직접 명태를 가공하는 작업을 하기도 하더라고요.
소영 씨가 일하는 회사는 종이상자 재조업체인데요. 2008년에 설립됐습니다. 직원 33명 가운데 21명이 4,50대 여성 탈북민으로 처음부터 탈북민과 저소득층의 일자리 제공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영 씨에게도 이 회사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거고요. 2006년에 한국에 정착한 김소영 씨는 북한에서 선전대 근무한 경험을 살려 탈북민으로 구성된 예술단에서 활동을 했는데요. 공연 일정이 불규칙적이고 어린 딸도 돌봐야 했기에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회사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한 자격증이 없었던 터라 김소영 씨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소영 씨는 지역에 있는 한 상점의 계산원으로 취업했습니다. 특별히 힘든 점은 없었지만 소영 씨는 좀 더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질병이나 장애, 노령, 실업, 사망 등이 발생했을 때 경제생활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인 4대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을 찾았습니다. 때마침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4대보험이 적용되는 회사를 소개했는데요. 그곳이 바로 사회적 기업, 종이상자 제조회사였습니다.
김인선: 얼핏 들으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종이상자를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거든요. 상자에 색을 입히고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상자를 대량으로 생산하려면 기본적으로 기계를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요. 선전대 활동을 했던 김소영 씨가 잘 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소영 씨는 북한에서 예술선전대 활동을 하기도 했고 큰 건설회사에서 기중기 운전공으로도 근무했었다고 합니다. 기계를 다루는 것은 어느 정도 익숙한 면도 있었지만 소영 씨도 종이상자를 만드는 작업은 처음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새로 배워야했습니다. 소영 씨 외에도 종이상자를 제조하는 곳에서 일해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사람도 있었고, 도자기 공장에서 그릇에 그림 그리던 사람, 양정사업소(식량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공공기관)에서 쌀을 배급하던 사람 등 전직이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회사 측에서 수십 년 경력의 상자 기술자를 초빙해서 직원들에게 기술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노력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기술, 단순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또 탈북민의 경우엔 한국의 회사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없기에 직장생활에 필요한 가장 초보적인 것부터 새로 배워야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직장생활하면 소통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데요. 탈북민의 경우 문화, 언어 등의 차이로 적응이 어렵거나 무관심 등의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소영 씨의 경우 동료들 대부분이 같은 탈북민이라 한결 수월했을 것 같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소영 씨가 근무하던 회사가 탈북민들의 취업과 자립을 돕기 위한 사회적 기업이다 보니 직원의 대부분이 탈북민들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탈북민들을 위한 회사이기에 회사를 위해 더 성실하게 근무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강하게 느껴졌기에 부담감도 많았다고 합니다. 소영 씨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까지 근무하고 받은 월급은 720달러(80만원)였지만 4대보험이 적용되는 일터이고 소영 씨가 바라던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여 어린 딸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직장이기에 더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는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소영 씨는 일이 힘들고 조건이 열악하다고 취직하고도 얼마 버티지 못 하고 퇴직하는 동료 탈북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소영 씨도 종이상자를 만드는 일은 처음이라 힘들었기에 좀 더 쉬운 일자리를 찾아볼까 하는 마음이 든 적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회사가 막 설립된 곳이라 업무환경이 완벽히 갖추어지지 않았는데요. 소영 씨는 처음에는 좀 열악하더라도 회사도 잘 되면 모든 게 더 나아지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성심을 다했습니다. ‘한 우물을 파면 뭐라도 성과가 있겠지’ 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초기에는 회사에 여성 근로자들만 있다 보니 힘들고 무거운 일을 할 때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소영 씨는 회사와 상의하여 남성 인력도 받아들여서 서로 도와가면서 업무를 해 나가게 되고 어려운 부분들을 서로 도와가면서 사회통합에도 기여했다고 하더라고요. 대부분의 사회적기업들은 정부나 사회단체의 재정지원을 통해 운영되지만 소영 씨가 근무 중인 회사는 직원들이 생산하는 종이상자 수익금으로 운영됩니다. 그런 점에서 탈북민 직원들의 자긍심과 만족감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는데요. 소영 씨는 힘든 일들도 많았지만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어려움을 이겨 나갔고 10년차 장기 근속을 하면서 주임으로 승진했습니다. 회사는 설립 3년 만에 매출액 30억 원, 2백 70만 달러를 돌파하며 탈북민 정착의 성공 사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김인선: 직장인의 경우 3년 주기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는 얘기를 선배들이 하는데 소영 씨는 주임으로 승진하기까지 난관이 없었을까요?
마순희: 소영 씨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소영 씨의 직급이 주임이었는데요, 북한식으로 말하면 작업반장 격이라고나 할까요?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소영 씨는 회사 매출이 상승하고 이익이 많아지면서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것은 너무 좋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이론처럼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소영 씨네 회사도 최근 코로나비루스와 함께 상황이 안 좋아졌습니다. 종이상자는 선물용이나 포장용으로 많이 만들어지는데 코로나비루스로 대형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공장 가동이 점점 줄었고 급기야 중단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사회적기업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운영이 잘 돼야 유지가 되는 거죠.
직원들 급여도 챙기기 힘든 형편이 된 회사에 언제까지 남아있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소영 씨는 다른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소영 씨는 자신이 할 수 있고 또 오랜 기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요양보호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얼마 전부터는 요양보호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소영 씨는 또 다른 우물을 파기 시작한 거죠. 그동안 고생도 많고 곡절도 많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소영 씨의 앞날에도 늘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김인선: 요양보호사라는 한 우물을 열심히 파게 될 김소영 씨의 앞날이 기대되네요. 한 우물을 파라는 김소영 씨의 생각이 맞는다는 걸 꼭 증명해내길 바라면서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