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코로나비루스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바깥활동을 최소화 하다보니까 계절을 제대로 못 느끼면서 살았는데요. 벌써 여름인가 싶을 만큼 낮엔 많이 덥더라고요.
마순희: 네, 올해는 왜 이렇게 봄이 더디게 오는가 할 정도로 날씨가 차고 바람도 많이 분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부터 갑자기 여름 날씨네요. 4월~5월, 이때쯤 봄꽃 구경도 다니고 주말을 이용해서 나들이도 많이 갔는데 올해는 코로나비루스 여파로 엄두도 못 냈어요.
김인선: 맞아요. 그래도 남한에서는 지난 5월 6일부터 코로나19 방역 체계가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이 그동안 자제했던 나들이를 많이 떠날 것 같아요. 물론 아직 방심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일상으로 돌아온 셈인데 의료진들은 예외가 아닐까 싶어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의료진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애쓰고 계시니까요. 의료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처럼 빠른 진정이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탈북민 중에도 의료진이 있는데요. 그 중의 한 분을 오늘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서울에 있는 한 의료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의료인인 김명희 씨입니다.
김인선: 성공시대 주인공 중에 간호사는 처음인 것 같아요. 탈북민 취업현황 등 각종 통계자료를 보면 그동안 탈북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과로 사회복지학, 경영학, 중국어학, 그리고 간호학을 꼽잖아요. 그 중에 간호학과는 취업이 잘 되는 편이라서 남한 토박이 중에서도 선호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알려졌는데요. 현장에서 일하는 탈북 간호사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서 종종 궁금했거든요.
마순희: 네, 제 주변으로도 간호사들을 보조하는 간호조무사나 환자나 노인을 돌보는 요양보호사, 간병인으로 근무하시는 분들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간호사는 적은 것 같습니다. 물론 탈북민들 중에 의사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고 간호사로 근무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제가 취재를 하면서 만난 간호사는 두, 세 명 정도였거든요. 그만큼 한국에서 간호사가 되는 게 쉽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북한에서는 간호사가 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전문 의학교육을 받지 않고 6개월 정도의 간호원 양성소를 졸업하면 간호원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간호사는 물론 간호조무사도 쉽지 않더라고요. 학원에서 실습과 이론시간을 이수한 뒤 국가고시를 치르고 자격증을 취득하면 간호조무사가 되니까요. 간호사가 되려면 4년 동안 전문 과정을 공부하는 간호대학을 졸업한 뒤 국가고시를 보고 면허증을 취득해야 하더라고요.
김인선: 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호칭은 비슷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전문가와 비전문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크죠. 특히 간호조무사는 비의료인이기 때문에 의료행위를 해서는 안 되지만 간호사는 의사가 없는 부득이한 상황일 때 간호규칙에 따라 의사의 지시 없이도 의료행위가 가능하잖아요.
마순희: 네. 간호조무사와 간호사가 얼핏 보면 같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같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간호사가 되려면 간호대학을 졸업하고도 자격증이 아닌 면허증을 따야 하는데 그 시험이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간호조무사는 740시간의 실습과 780시간의 이론교육을 이수하면 시험을 치룰 수 있지만 간호사는 4년이라는 과정을 이수해야 시험을 치를 수 있고요. 과정도 길고 이수해야 하는 과목들도 쉽지 않기 때문에 간호학을 지원하는 탈북민이 많은 것에 비해 중도 탈락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그럼, 명희 씨는 그 어렵다는 과정을 다 거쳐서 간호사가 된 건가요? 아니면 북쪽에서 간호사였을까요? 탈북민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전문직일수록 북한에서 했던 직종을 계속하고 싶어 한다고 알고 있거든요.
마순희: 북쪽에서의 간호사 경험, 그런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명희 씨는 북한에서 경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수도 사업소에서 수질검사원으로 근무했으니까요. 명희 씨가 아니라 명희 씨의 할아버지가 북한에서 의사셨다고 합니다. 명희 씨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근무하시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많았고 할아버지도 다른 식구들보다 어린 명희 씨를 더 예뻐해 주시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명희 씨의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의사로 근무하시면서 한국에 살고 계시는 친구분과 연락하며 암암리에 기독교의 선교 사업에 동참하셨다고 합니다. 그 일을 식구들과는 비밀로 하면서 명희 씨 하고는 함께 한 거죠. 여러 북한주민들에게 극비로 기독교를 전파하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드렸다고 하는데요. 그 일을 몇 년 거듭하다보니 어느 곳에선가 비밀이 탄로 났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피할 사이도 없이 보위부에 검거되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할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뒤라 명희 씨만 체포됐습니다. 어머니가 사방으로 줄을 놓고 빼 내려고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답니다. 북한에서 선교활동은 엄중한 정치적 탄압대상이니까요. 담당 보위지도원은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하고 외부의 압력을 피해서 명희 씨를 보위부 감방이 아닌 외딴 곳에 있는 한 창고에 감금했다고 하는데요. 빠져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명희 씨는 어느 날 밤 감금된 창고의 창문을 뜯고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그 길로 중국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던 할아버지의 친구 분을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정말 듣기만 해도 손에 땀이 나네요. 영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일들이 명희 씨 인생에서 일어났는데요. 그럴 때 한국에 지인이 있었다는 건 천만다행인 것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할아버지의 북한 선교활동을 돕던 그 친구 분은 명희 씨의 양할아버지라 자신 있게 말할 만큼 여러 도움을 주셨는데요. 중국에서도 그분의 도움으로 서류를 조작해서 한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24살의 어린 나이에 혼자 한국에 왔기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명희 씨는 양할아버지의 조언으로 안정된 정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원 시절부터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참고서적들로 앞으로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양할아버지가 명희 씨에게 추천한 게 바로 간호학과였다고 하는데요. 명희 씨 역시 어려서부터 의사로 근무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의료인을 꿈꿨었기에 양할아버지가 보내준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북한에서 의사나 간호사는 모든 사람들이 희망하고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남한에서 의료인을 꿈꿨던 명희 씨는 의사가 되는 것보다 간호사, 북한식으로 간호원이 되는 것이 좀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에서 간호원은 간호학교라는 비정규 과정에서 교육을 받고 할 수 있는데 1년제이고 또 지방마다 수요에 따라서 6개월짜리 간호원 양성소를 거쳐서 간호사 수요를 충당하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제1외국어(일본어 혹은 영어)등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최대 1년에 그치는 정도이기 때문에 명희 씨는 1년 열심히 공부하면 간호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김인선: 현실이 생각한 것과 너무 달라서 명희 씨가 많이 놀랐겠어요. 사실 간호학을 전공하는 탈북민이 많은 것에 비해 중도에 탈락하는 학생이 많은 것도 의사들과 똑같이 사용하는 의학용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어려움 때문이라고 하거든요.
마순희: 맞습니다. 의학용어 뿐이 아니라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는 학업구조와 국가고시도 어려운 고비라고 하더라고요. 북한에서는 따로 면허를 취득하는 시험이 없고 졸업시험을 치른 후 간호원 등록증이 나온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간호조무사 자격증도 국가고시를 봐야 합니다. 탈북민의 경우 큰 규모의 시험을 준비한 경험이 부족하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실습까지 병행하는 것에 더 큰 부담감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이런 남북의 차이는 북한에서 배운 학문이 남쪽에서 간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그래서 걸음마를 시작하듯 0부터 시작된 명희 씨의 간호사 되기, 과연 무사히 간호사 면허증을 딸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