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방향을 잡아라! 당당히 홀로선 김인화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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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벌써 한여름이 된 것처럼 햇볕이 뜨거운 요즘인데요. 그래도 아침, 저녁엔 선선해서 감기 걸리기가 쉽습니다. 건강에 유념해야 하는 요즘인데요. 운동도 하고 부지런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몸이 쉽게 따라주지 않더라고요. 이런 저에게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몸은 마음을 따라간다! 행동도 그 사람의 마음을 따라간다’ 라고 말이죠.

마순희: 맞습니다. 마음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니까요. 우리 탈북민들의 삶만 보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고 인생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정부보조금을 받으며 지낼 수도 있지만 적은 돈이라도 자신이 땀 흘려 번 돈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도 있고요.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한 형편이라고 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주위의 더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나눔을 실천하시는 사람도 많습니다. 제 주변엔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한국생활을 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2010년에 한국에 입국해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정착하고 있는 김인화 씨인데요. 올해 64세인데 지금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근면하고 성실한 분이거든요.

김인선: 사람마다 삶의 목표가 다 다르죠.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 목표라면 또 어떤 사람은 명예롭게 사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등 다양한데요. 각자 생각하는 인생에 대한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나 살아가는 방법, 살아가는 과정이 다 달라지더라고요. 오늘의 주인공 김인화 씨의 삶은 어떨까요?

마순희: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굴곡진 삶을 살면서 살아가는 목적이 변하는데요. 김인화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인화 씨는 성인이 돼서도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함경북도의 한 변방도시에서 두 아들과 딸을 둔 평범한 노동자 가정의 가정주부로 지냈으니까요. 하지만 온 나라를 기아로 휩쓸어버린 고난의 행군은 인화 씨에게도 큰 변화를 줬습니다. 매달 꼬박꼬박 나오던 배급만 믿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배급이 끊기면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가 삶의 목적이 된 겁니다. 그때 항간에는 중국에 가서 농사일을 도와주면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따져보지도 않고 인화 씨는 친구들과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조선족 브로커를 따라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굶고 있는 식구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돈을 벌게 해 준다던 조선족 브로커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인화 씨와 친구들은 인신매매자들에게 팔려 뿔뿔이 헤어지게 됐습니다. 연변지역에 있으면 북한에 도로 잡혀 나갈 수 있다면서 안전한 곳으로 보낸다고 했다는데요. 인화 씨는 산동성의 한족 동네로 가게 됐습니다.

김인선: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에 들어온 10명의 탈북여성 중 7명이 중국 인신매매의 피해자라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탈북여성들이 중국에서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했다고 고백하기도 하고요. 주로 조선족에게 팔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화 씨가 간 곳은 한족 동네네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마순희: 가장 특별한 이유, 바로 돈이죠. 브로커들에게 탈북여성은 ‘돈’이니까요. 조선족에게 탈북 여성을 팔면 돈을 얼마 못 받지만 한족에게 팔면 큰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말도 모르는 한족에게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인화 씨는 말 한 마디 모르는 한족 동네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삼엄한 경계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한족 남편이 언제 도망갈지 모른다며 인화 씨를 밤낮없이 감시를 했기 때문입니다. 인화 씨는 식구들 생각에 가슴을 치며 후회도 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가정을 위해 돈 벌러 왔는데 돈은 고사하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됐으니 그 마음의 고통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굶고 있을 가족, 특히 아이들이 생각나서 더 힘들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땐 굶는 날이 점점 많아졌는데 한족 동네에선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화 씨는 굶고 있을 식구들 생각에 목이 메었고 따뜻한 솜옷이나 솜 신발을 신을 때면 눈 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식구들 생각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화 씨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시간이라는 약의 막강한 힘을 경험하면서 중국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한족 남편은 다정다감하지는 못해도 폭력적이진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엔 아이도 없어서 양육이나 교육에 대한 부담도 없었습니다. 인화 씨는 겉보기에 지극히 평범한 한족 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인화 씨 삶은 또 다시 변하게 되는데요. 중국에서 10년 넘게 살다가 2010년 3월 중국을 떠나 3개월 만에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입니다.

김인선: 10년이 지났으면 충분히 안정을 찾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사이 인화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마순희: 10년이라는 세월의 익숙함을 버리고 낯설음을 선택하려면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화 씨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런데도 변화를 선택한 것은 우리 탈북민들이 처한 현실 때문입니다. 중국 공안의 탈북민 색출을 위한 시도 때도 없는 수색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인화 씨는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남편을 설득해 한국행을 하게 됐습니다. 남편은 인화 씨가 북한으로 잡혀 나가는 것보다는 한국에 가는 것이 낫겠다며 보내줬습니다. 인화 씨가 함께 한국에 가자는 제의를 했는데도 남편이 거절했다고 합니다. 말도 모르는 한국에 가서 자신은 살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인화 씨에게 한국 가서 잘 살라고 했다는데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연결고리가 없어서인지 중국에서 지낸 10년의 세월을 뒤로 한 후로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들었던 중국 남편 중에서 가장 멋진 분이시네요. 남편의 바람대로 인화 씨가 한국에서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요. 인화 씨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걱정이에요. 중국에서 지낼 때에도 북한에 있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마음 편히 못 지냈다고 했잖아요?

마순희: 네.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다들 그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애써 숨기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는 더 깊어지고 곪게 되는데요. 김인화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과 어린 자식들을 두고 온 인화 씨의 상처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아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한국에 와선 어떻게든 북한에 있는 가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에는 연락할 기회도 형편도 안 돼서 소식을 알 수 없었지만 한국에 와서는 여느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인화 씨도 북한 가족에게 연락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브로커의 속임수에 넘어가 돈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화 씨는 포기하지 않았고 드디어 사랑하는 아들과 연락이 닿게 됐습니다. 하지만 매번 아들은 도청이 두렵다며 짧은 통화로 마무리했습니다. 인화 씨는 10년이 넘도록 엄마 노릇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경제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글타글 벌어 쓰지도 못 하며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보냈습니다.

김인선: 자신이 덜 먹고 덜 쓰면서 모은 돈을 북한으로 보내는 탈북 여성들이 정말 많죠. 남한에서 잘 먹고 잘 살아서, 여유 있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북한에 있는 자녀들과 가족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생기는데요. 인화 씨의 아들은 알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