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 진심은 통한다, 요양보호사 김선희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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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같은 핏줄이 아니라도 ‘가족’과 같은 관계가 있습니다.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이나 탈북민들은 고향이 같기만 해도 가족처럼 애틋하게 여기고요.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들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환자를 가족처럼 여기며 돌봅니다. 김선희 씨도 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요양보호사인데요. 지난 시간에 이어 이야기 나눠보죠.

마순희: 네. 김선희 씨는 올해 59살로 10년차 요양보호사입니다. 한국에 입국한지 몇 달 만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시작한 일이 선희 씨의 천직이 된 거죠. 물론 초반엔 어려움도 있었지만 선희 씨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트집을 잡는 어르신도 있어서 힘들었지만 자신이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돌봐 드리던 어르신들의 태도가 달라졌다는데요. 그런 변화에 선희 씨는 요양보호사 일에 자긍심을 갖게 됐습니다.

김선희 씨는 몸이 불편한 독거노인들 댁에 직접 방문해서 보살펴드리는 재가요양보호사인데요. 재가요양보호사는 보통 한, 두 명의 어르신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돌봐 드리는 일을 하는 전문가입니다. 돌봄서비스는 환자마다 요양급수에 따라서 시간이 지정되어 있거든요. 65세 이상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은 누구나 신청할 수 있고 65세 미만이라도 노인성 질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답니다. 국가에서 지원해주고 도움을 주는 장기요양보험서비스를 신청하면 요양급수에 따라서 돌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원제도는 100세 시대에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김인선: 거동이 불편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잖아요.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서 불편할 수도 있고 장애 때문일 수도 있고요. 김선희 씨가 돌봐 드리는 어르신은 어떤가요?

마순희: 교통사고로 인해서 불편하신 분들은 요양서비스를 받을 수 없고 그럴 때에는 간병인을 고용해서 돌봄을 받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요양보호사가 돌보는 분들은 중풍 같은 노인성 질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을 위한 국가적인 지원제도거든요. 중풍을 북한에서는 흔히 풍을 맞았다고 이야기하는데요. 돌봐주는 전문가가 없어서 가족이 무조건 챙겨야 합니다. 북한에선 풍에 걸린 사람을 방안에 두고 문 걸어 놓고 나가는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겁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오랫동안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돌보다 보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지치기 마련이잖아요? 북한에선 풍에 걸린 사람에겐 먹을 걸 일부러 조금 주기도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병에 걸리면 1년을 넘기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남한에서처럼 요양보호사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네요.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들도 경제적 활동이나 사회활동도 해야 하기 때문에 보호자가 있더라도 전문 간병인인 요양보호사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찾아와서 환자가 필요한 부분을 돌보아 드리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양보호사는 손발이나 얼굴도 씻기고 음식준비도 하고 집안 정리정돈도 합니다. 또 함께 시장을 봐서 식사준비도 하고 어르신을 위해서 간단한 안마도 해주고 말벗도 해주는 등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환자 본인을 위한 돌봄이지 환자의 가족들에 대한 돌봄은 절대로 안 하거든요.

김인선: 그렇군요. 제 주변 분들 중에서도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중풍을 앓는 경우가 있어요. 그분을 보니까 가족이 있어도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더라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비전문가인 가족보다 전문가인 요양보호사의 손길이 훨씬 더 필요하고 또 적절할 테니까요. 장애인과 노인에 대한 복지가 늘면서 장애인과 노인들을 돕는 요양보호사와 장애인 활동보조인 같은 직업이 생겨난 것인데요. 특히 의학과 과학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면서 한국에서는 노인복지와 관련된 직업군이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탈북민들 중에서도 몇 년 전부터 노인복지, 사회복지 관련 직업군에 관심 갖고 자격증 따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시대, 이 시간에 소개해드리는 분들 중에도 요양보호사, 장애인 활동보조인, 사회복지사에 대한 사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김선희 씨가 돌봐 드린 어르신들 중에는 혼자 계신 탈북 어르신도 있는데요. 중풍이 온 데다가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시고 담배도 지독하게 피우는 분이었습니다. 성격도 쉽지 않아서 쩍하면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어서 여러 요양보호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만두었다고 하는데요. 김선희 씨가 그 어르신을 맡게 되자 모두들 며칠 못 가서 그만두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선희 씨는 오랫동안 함께 하고 있는데요. 처음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니까 거의 10년이 되겠죠. 선희 씨는 아무리 어르신이 심통을 부리고 힘들게 대해도 인내심을 가지고 성심껏 어르신을 돌봤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어르신의 심통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데요. 아무리 몸이 아프더라도 이렇게 매일 찾아주고 돌보아주는 요양보호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못해도 힘들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대한민국에 고마운 줄 아시라고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김인선: 그러다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시겠어요.

마순희: 아니요.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어르신이 선희 씨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다른 요양보호사처럼 며칠 못 가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김선희 씨는 달랐으니까요. 고향음식이 생각나지는 않을까 정성스럽게 반찬도 해주고 따끔한 충고도 계속하는 선희 씨의 모습에 생각이 달라진 겁니다. 2년 넘게 돌봐 드리던 어느 날, 밑반찬을 만들어다가 식사를 시키고 있었는데 그 어르신이 갑자기 선희 씨에게 그동안 미안했다고, 이 술잔을 마지막으로 술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어르신은 50년 세월을 매일같이 마시던 술을 딱 끊고 담배도 많이 줄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몸도 더 많이 나아지시고 성격도 훨씬 좋아진 어르신을 볼 때마다 선희 씨는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보람을 느끼고 이 일을 잘 택했다고 생각한다고 하네요.

김인선: 자식들도 못하는 일을 김선희 씨가 하네요. 요양보호사가 아니라 효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김선희 씨는 직업적으로만 어르신을 돌본 게 아니라 봉사로도 어르신들을 위한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같은 탈북민들과 함께 ‘행복봉사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원래 노래를 잘 부르는 김선희 씨는 동료들과 함께 예술공연으로 봉사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남한에선 아코디언이라고 하죠. 손풍금을 구입하고 멀리 서울에 있는 학원까지 찾아가서 아코디언 연주를 배워서 직접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한답니다.

김인선: 정말 바쁘게 지내네요.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라 또 다른 일도 한다면서요?

마순희: 네. 김선희 씨 는 2013년부터 탈북민 정착도우미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희 씨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숨은 조력자가 있는데요. 지역상담사의 소개로 2009년에 만난 지금의 남편입니다. 봉사단이 먼 곳으로 봉사를 갈 때면 남편이 차량봉사를 해주었고 늦게라도 돌아오는 날이면 꼭 마중을 나오는 자상한 남편이 있어서 선희 씨의 하루하루는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김선희 씨도 이제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하지만 몸이 건강할 때까지 남을 위해 기쁨을 주고 좀 더 사랑을 많이 베풀며 사는 것이 작은 소망이라고 하는데요. 앞으로도 남편과 아들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늘 온 가족이 행복하기를 5월 가정의 달을 맞으면서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인선: 상대방이 아무리 몰라줘도 언젠가 진심은 통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김선희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선희 씨와 선희 씨가 돌봐 드리는 어르신은 마음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닐까 싶은데요. 다음 시간엔 김선희 씨의 진짜 가족,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