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긍정적으로 쌓아가자, 간병인 김혜정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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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코로나비루스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 100일이 지나면서 백신 접종자 수가 1152만 7,605명으로 금세 늘었는데요. 지난 6월 7일부터는 60∼64세 고령층과 30세 미만 군 장병에 대한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미국 정부가 제공한 얀센 백신 접종도 10일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4-50대가 가장 마지막 접종 대상자이다 보니 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거든요. 선생님은 맞으셨죠?

마순희: 네, 저는 어르신을 돌보는 주간보호센터에서 근무하다 보니 진작에 2차 접종까지 다 끝냈답니다. 의료진과 노인 복지시설 등 보건의료인들이 접종 우선 대상자라 저도 우리 센터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접종할 때 함께 받았거든요. 접종 받기 전에는 1주일에 한 번씩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요즘은 2주일에 한 번 꼴로 코로나 검사를 하게 됐어요. 백신을 맞았기 때문에 코로나 검사를 안 해도 된다는 얘기도 있지만 여전히 조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랑 같은 마음으로, 비슷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계실 텐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성공시대 주인공도 그 중 한 분입니다. 2008년 한국에 입국한 김혜정 씨인데요. 올해로 간병인 경력이 13년차 되는 노련한 분입니다.

김인선: 한국에 정착한지 얼마 안 돼서 바로 간병인 일을 시작한 셈이네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한 분들을 보면 대부분 북쪽에서 비슷한 일을 하던 분들이었는데요. 혜정 씨도 마찬가지일까요?

마순희: 혜정 씨는 정착한지 1년 정도 지나서부터 간병인 일을 했으니 자신에게 잘 맞는 직업을 바로 찾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비슷한 일을 했는지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혜정 씨 본인은 아니지만 가족들 중에 의료부문에서 근무하는 식구들이 여럿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혜정 씨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큰 어려움 없이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혜정 씨는 함경북도의 한 도시에서 동 여맹부위원장을 하면서 장마당에서 식당도 운영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크게 어렵지 않게 생활했었다고 하는데요. 2007년 시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모든 사람을 갑자기 집중적으로 단속하면서 형편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시에서는 식당에서 쓰던 물자들을 모두 압수하고 혜정 씨를 구치소에 가두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나라에 손 벌리지 않고 제 힘으로 살아가려고 아글타글 했을 뿐인데, 그것을 문제 삼으니 도저히 그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김혜정 씨는 탈북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여맹부위원장에 식당까지 운영했던 혜정 씨는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요. 지인 중에 브로커도 있었습니다. 그분의 소개로 혜정 씨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김인선: 북한 분들이 브로커를 믿고 중국으로 향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사기를 당하고 속아서 인신매매로 팔려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걱정이네요. 혜정 씨는 어땠을까요?

마순희: 네. 다행히 혜정 씨에겐 그런 불행이 없었습니다. 혜정 씨는 무사히 강을 건넜는데요. 브로커를 하는 지인이 중국에서도 단속이 엄청 심하다면서 한국에 가야 안전하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혜정 씨는 그의 말을 따라 강을 건넌 지 한 주일 만에 태국에 도착했는데요. 좁은 공간에 몇 백 명을 수용한 태국 감옥에서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태국 감옥 안에서 잠시라도 앉으려면 자리를 사야 했습니다. 결국 혜정 씨는 한국에 가면 물어주기로 하고 거금을 주고 겨우 자리를 사 가지고서야 비집고 앉을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혜정 씨는 중국과 태국을 거쳐 2008년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면서 저희들은 초기 정착금을 받게 되는데요. 그 돈으로 혜정 씨는 브로커 비용과 태국 감옥에서 빚진 자릿세부터 먼저 해결했습니다.

김인선: 말 그대로 한국에 정착하는데 쓰라고 지원해 주는 정착지원금인데, 그 돈으로 다 빚을 갚았으니 혜정 씨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혜정 씨는 처음에 밥과 가장 값싼 두부, 그리고 된장국으로 버텼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머지 지원금이 있어서 혜정 씨가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탈북민에게 직접 지급하는 정착금 외에 임대아파트를 유지할 수 있게 지원해주는 주거지원비, 그리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도록 도와주는 직업훈련 장려금, 취업 장려금, 자격취득 장려금, 직업훈련수당 등 간접적으로 지급하는 지원금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2004년까지만 해도 이 모든 지원금을 한꺼번에 탈북민에게 직접 지급해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갑자기 목돈이 주어지니까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쓰기만 하는 여러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탈북민들의 자립의지를 저해한다는 평가가 꾸준하게 제기돼 왔고 제도가 개선됐습니다. 탈북민에게 지급되는 지원금의 전체 규모는 유지하되, 탈북민에게 일시에 직접 지급하는 정착금은 대폭 축소하고 나머지 지원금은 다양한 취업지원제도를 통해 나누어 지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사회에 정착한 이후 탈북민이 자립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일부 지원금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사회에 잘 정착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원의 목적이잖아요?

김인선: 맞습니다. 지원금에 의존하다 보면 사회생활을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찾는 일에 소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안정적인 정착도 느려지죠. 그렇다면 혜정 씨는 적극적으로 정부의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그럼요. 혜정 씨는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후 취업을 위해서 가장 먼저 직업전문학교에서 취업교육을 받았습니다. 빵집을 운영하는 탈북 선배를 보고 혜정 씨는 제과제빵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탈북민에게 자격취득 장려금이 지급되는 제도를 통해 제과제빵 학원에서 교육받고 졸업도 했습니다. 혜정 씨는 관련 자격증도 취득했지만 취업이 어려웠습니다. 탈북민에게 다양한 교육을 해주고 성공적인 사회정착을 돕는 민간단체를 찾기도 했지만, 혜정 씨가 원하는 분야로 취업이 연결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보낸 시간이 1년쯤 지났을 때, 지인이 병원에서 간병인을 구하는데 혹시 일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더랍니다. 어디서든 일을 하고 싶었던 혜정 선뜻 간병인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우리 탈북민들이 많이 하고 있는 일 중 하나가 바로 간병인과 요양보호사죠. 두 직업 모두 진심으로 환자를 잘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데요. 환자를 간호하는 간병인을 하다가 재활 관련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따서 요양보호사가 되는 탈북민들도 많더라고요. 혜정 씨는 어땠을까요?

마순희: 네. 혜정 씨가 일을 하면서 보니까 같은 일을 하면서도 대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전문교육을 받고 국가자격증을 소유한 요양보호사에 대해서 보호자들도 환자들도 더 신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겁니다. 그래서 혜정 씨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녔습니다. 혜정 씨는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으로만 만족해하지 않고 장애인 활동보조인 자격증까지 취득했습니다. 더 전문적으로 장애인 환자를 돌볼 수 있기 때문인데요. 일반인 간병과 비교할 때 수입의 차이도 많이 난다고 합니다.

김인선: 간병인은 특별한 자격을 갖추지 않아도, 나이에 상관없이 봉사정신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혜정 씨에겐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네요. 장애인 활동보조 자격을 갖춘 간병인은 흔치 않으니까요. 혜정 씨가 13년차 간병인으로 갖는 자부심도 굉장할 것 같은데요.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