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는 귀천이 없다, 김명철 씨 (1)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최근 갓 탈북한 여성들을 위한 의료시설이 확장했습니다. 전체 탈북민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에 비해 산부인과 시설과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난 4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내에 산부인과 시설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마순희: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북한에서는 물론 탈북과정에서 탈북여성들은 정기적인 산부인과 검진을 받을 수 없거든요. 한국에 입국하기 전까지 제3국에 체류하는 과정에서 임신하거나 부인과 질환에 걸려도 신분이 불안해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탈북여성들은 다양한 부인과 질환으로 고생을 하게 되죠. 심한 복통을 느낀 후에야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에 말에 따르면 탈북여성들은 여러 가지 환경적인 이유로 염증 질환에 많이 노출돼 있고, 이로 인해 임신을 했을 경우에도 임신 합병증이 우려된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견해에 따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 산부인과 시설과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됐었는데요. 정부 차원에서 시설과 인력을 늘렸으니 막 입국한 탈북여성들의 건강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원 퇴소 후에는 정부에서 무료로 해주는 건강검진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여성 질환으로 고생하지 않도록 탈북여성 스스로가 건강관리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에도 산부인과 시설이 확장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동시에 떠오르는 분이 계신데요. 산부인과와 관련해 아픈 기억이 있는 김명철 씨입니다. 함경북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살다가 2007년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으로 소개해 드릴게요.

김인선: 남자분인데 산부인과 이야기에 아픈 기억이 있다고요? 김명철 씨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마순희: 네, 원래 김명철 씨는 동해바닷가의 한 지방도시에서 수산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다들 살기 힘들었지만 김명철 씨는 본래 가지고 있던 기술 덕분에 낡은 배를 수리해서 바다에서 수산물을 건지다 보니 큰 고생을 안 하고 식구들을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두 명철 씨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남부럽지 않게 살던 명철 씨였는데, 그에게도 어느 날 뜻밖의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아내가 산부인과 수술을 받게 됐는데 수술이 잘못되었고 의료시설이 엉망인 곳이라 복막염으로까지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명철 씨 부인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명철 씨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산부인과 수술을 잘 하는 의사가 있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가지고 있던 배를 모두 처분한 것입니다. 명철 씨는 배 판 돈으로 무산으로 이사했고 아내를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인선: 부인을 살리고 싶다는 명철 씨의 간절함이 느껴지는데요. 배를 판 돈으로 명철 씨 부인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아니요. 안타깝게도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명철 씨의 부인은 세 차례의 재수술을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는데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술을 집도했던 산부인과 과장이 연로보장(은퇴)으로 병원을 나가다 보니 치료는 더 절망적이었다고 합니다.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던 명철 씨는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많은 뒷돈을 써 가면서 산부인과 과장의 집에서 몰래 부인을 치료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무사히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담당 주재원(지금은 보안원)의 단속이 심했는데 뇌물을 바치면 한동안 잠잠하다가도 얼마 안 있으면 또 생트집이었습니다. 그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지만 명철 씨는 어쩔 수 없이 고급담배며 술이며 그가 요구하는 대로 상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명철 씨 부인은 결국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고 합니다.

김인선: 명철 씨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까요. 누구보다 부인에 대한 사랑이 깊었기 때문에 명철 씨가 걱정이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명철 씨는 어떻게든 아내를 살려 보려고 무진 애를 써온 것이 너무 허탈했고 뇌물을 받으면서도 제대로 치료도 받을 수 없게 걸음걸음 힘들게 한 담당주재원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하다는 생각뿐 이었습니다. 명철 씨는 반드시 이 나라를 떠나서 북한의 실체를 만천하게 고발하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어린 아들과 남아있던 재산을 맏누이네 집에 맡기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무사히 강을 건넜지만 중국에 도착해 찬찬히 생각해 보니 북한을 떠날 때 마음과 달라지더랍니다. 남아있는 식구들을 생각해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거죠. 김명철 씨는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었기에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아들이 걸리긴 했지만 남아있는 재산과 함께 맏누이 집에 부탁을 했기에 명철 씨는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겪기도 했지만 명철 씨는 브로커를 통해 2007년 한국땅을 무사히 밟을 수 있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나올 때 40대 초반이었던 명철 씨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고 합니다.

김인선: 그런데 북한에선 낡은 배를 고쳐 수산물 채취만 해도 넉넉하게 살 수 있었겠지만, 남한에 와서 같은 일을 하기엔 절차가 복잡하기도 하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아무리 기술을 가졌다 해도 한국에 온 초기에는 명철 씨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명철 씨가 가진 기술은 배를 고치는 정도의 기술이었고 남한에서 기술자로 살아가려면 그 분야에 따른 기술자격증이 있어야 하니까요. 자격증과 실무경험을 위해서는 학원에 다녀야했는데, 명철 씨에게는 사치로 여겨졌습니다.

김인선: 정부 차원에서 탈북민을 위한 다양한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혹시 명철 씨가 그런 정보를 몰랐을까요?

마순희: 아니요. 취업을 위한 교육비가 지원된다는 것은 명철 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취업준비로 학원에 가거나 기술을 배워서 취직한다는 것은 그에게 사치였습니다.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김명철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 실 거주지에서 살아가는데 쓰라고 지원하는 탈북민 초기정착지원금을 하나원을 나온 직후에 바로 썼다고 합니다. 당시 브로커 비용이 300만원이었는데 한국정부에서 탈북민에게 직접 건네는 초기정착금도 300만원, 2640달러였다고 합니다. 명철 씨는 그 돈을 브로커에게 다 주었던 겁니다. 명철 씨는 먹고 살기 위해서 아무 일이나 해야 했습니다. 명철 씨는 부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한국 정착 6일 만에 찾은 일자리는 주유소였습니다.

김인선: 주유소에서 부업을 하는 일이 간단해 보이는 것 같아도 쉽지 않거든요. 휘발유랑 경유를 잘 구분해서 넣어야 하고 결제부터 구매한 금액에 따라 점수가 쌓이는 포인트 카드 적립도 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명철 씨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차마다 주유하는 방법이 달라서 한국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탈북민들이 특히 애를 먹거든요. 제가 잘 알고 있는 지인도 처음 한국에 와서 주유소에서 부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명철 씨는 그나마 빨리 적응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것이 생소했지만 타고난 눈썰미와 성실한 성품 덕에 한 달이 지나서부터는 모든 일을 큰 어려움 없이 해 나갔다고 합니다. 명철 씨는 주유소에서 일하면서도 식당의 고기 굽는 불판을 닦는 등 다른 부업까지 병행을 했습니다. 하루 빨리 돈을 벌어서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을 데려 오겠다는 일념으로 명철 씨는 잠자는 시간 빼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겁니다.

김인선: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당장 돈벌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부업부터 일을 시작하는 탈북민들이 있는데요. 어느 정도 심적으로 안정이 되면 기술을 배우거나 자격증을 취득해서 안정된 회사에 취업하는 게 좋다는 판단을 내리더라고요. 명철 씨도 차츰 일자리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을 텐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