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평범한 일상이 참 그리워요. 더운 날씨에 마스크까지 하려니까 시원한 커피전문점이나 식당에서 편안하게 먹고 수다 떨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를 알게 됐거든요.
마순희: 맞습니다.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식당에서도 한 방향으로 띄어 앉아서 식사를 해야 하니 즐겁게 이야기 나누면서 식사하던 때는 옛말처럼 돼 버렸네요. 하루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어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큰 요즘입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 누구나 바라는 삶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은 평범한 직장인 정미자 씨의 사례를 소개해 드릴까 하는데요. 미자 씨는 올해로 한국에 정착한 지 15년 된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김인선: 평범하게 산다는 것.. 어떻게 보면 소박한 바람 같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미자 씨 가 지금의 평범한 삶을 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굴곡진 시간들을 보냈을까 싶어요.
마순희: 네, 정미자 씨 역시 소박한 바람인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기까지 쉽지 않은 인생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미자 씨는 함경북도의 한 국경도시에서 살았다고 하는데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에 배치 받았고 역에서 출표원으로 근무하다가 인근 지역의 목장에서 일하는 제대군인인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됐습니다. 가정을 이룬 미자 씨는 두 자녀를 키우면서 전업주부로 큰 걱정 없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것 같죠? 그런데 90년대 초 어느 날 남편에게 문제가 생겼답니다. 일하던 곳에서 친구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싸움이 예상외로 커졌고 크게 다친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남편의 잘못만은 아니었지만 그냥 있으면 잡혀 갈 것이 뻔했던 실정이라 남편은 중국으로 피신했습니다. 남편 없이 미자 씨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두 자녀를 키우면서 기약 없이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데요. 12년 만에 남편이 기별을 보냈습니다.
김인선: 얼마나 감정이 복잡했을까요? 제가 미자 씨라면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남편이기에 잊고 살았을 것 같거든요. 물론 살아있다는 반가움도 있지만 원망도 컸을 것 같고요.
마순희: 아마도 미자 씨의 마음은 잡혀서 북한에서 감방생활을 하는 것 보다는 어디서라도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가정에 소홀하거나 부부사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남편을 향한 미자 씨의 마음은 오히려 안쓰럽고 더 애틋했을 것 같습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실제로 중국에서 숨어 사느라 그동안 소식 한 번 전하지 못했다는 미자 씨의 남편은 ‘아픈 몸으로 혼자 고생하지 말고 중국으로 들어오라’ 하면서 차편까지 구해서 보냈다는데요. 미자 씨는 위험하기도 하고 또 당신 혼자 죄지은 것도 모자라서 나까지 나쁜 길로 오라고 하느냐고 단호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2004년 다시 브로커를 통해서 연결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자 씨의 건강이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남편은 중국에 와서 약만 가져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만 그동안 애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며 딱 한 번만이라도 얼굴 좀 보게 해 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두 아이들에게도 아버지를 한번쯤은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미자 씨는 브로커를 따라서 중국에 가서야 남편이 이미 한국에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브로커의 안내를 통해서 한국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까지 오는 길이 순탄하지 않았는데요. 당시 언론매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북경의 한국 국제학교에 진입했던 30명의 탈북자 이야기 아시죠? 그 일행 중에 미자 씨 가족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김인선: 기억나요. 당시 탈북민들의 공관이나 국제학교 진입이 많았는데요. 언론을 통해 각국에 보도됐고 그에 따른 우려도 많았으니까요. 그동안 중국에서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을 경우 탈북민들의 `한국행'을 암묵적으로 허용해왔는데 중국 당국의 탈북민 정책에 변화가 생기는 것 아니냐며 염려를 한 거죠.
마순희: 그럼요. 탈북민들이 한국입국을 하기까지 여러 가지 통로들이 있는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면 그 통로가 드러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다시는 그 통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공개가 되면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라도 체포 혹은 북송을 하는 비인도적인 일은 막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 통로는 경계가 심해지고 다시는 이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멀고 험한 동남아의 여러 나라를 거쳐서 혹은 몽골의 사막지대를 넘죠. 그에 비한다면 미자 씨의 일행은 북송의 위험은 없었습니다. 대신 거의 1년을 북경의 한국영사관에서 체류하고 나서야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희 식구가 한국으로 올 때에도 북경 영사관을 통해서 왔는데요. 목숨 걸고 뛰어 드는 것도 위험했지만 3개월을 체류하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미자 씨는 15, 17세 두 자녀를 데리고 1년 가까이를 영사관에서 체류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게 견뎠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더군요.
김인선: 아무래도 영사관은 직무를 보는 공간이다 보니까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많았겠지만 혹시라도 영사관 측에서 탈북민들이 지내는데 소홀하게 대했던 건 아닌지 궁금하네요.
마순희: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영사관에서는 탈북민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북민들이 불의에 들이닥쳤는데도 여러 방법을 마련했거든요. 영사님들의 사무공간을 좁히기도 하고 내어 주면서 임시로 수용시설을 설치해 주었어요. 초기에 인원이 몇 십 명일 때에는 운동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탁구도 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후에는 그 공간마저 수용시설로 이용해야 할 만큼 인원이 증가했습니다. 매일매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축내며 한국에 갈 날 만 기다리다 보니 점차 불안과 짜증이 많아지고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나마 중국에서 몇 년씩 살다가 들어 온 사람들은 괜찮겠지만 미자 씨처럼 북한을 금방 떠나 온 사람들인 경우에는 음식이나 환경 같은 것들이 더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영사관에서 지내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정미자 씨의 경우엔 한국에 와서 적응할 때엔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국에 먼저 와 있던 남편이 있었으니까요.
마순희: 물론 정신적으로는 많이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십 수 년을 헤어져 살다가 한 집에 살게 되니 처음에는 꿈만 같고 반갑고 좋기만 했다는데요. 미자 씨의 남편은 중국에서 12년을 체류했었기에 탈북민 거의 모두가 받는 보호결정을 받지 못했고 정착금 지원도 없어서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자 씨 가족은 끈끈한 가족애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었습니다. 먼저 한국에 정착한 남편은 힘든 일용직을 하면서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는 것과 함께 특히 자녀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정보들도 알아보았다고 하는데요. 가족이 도착하자 대안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켰습니다. 일반적으로 학력의 공백이 길거나 또 중국에서 오래 살아서 한국말이 서툴거나 부모님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혹은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원만치 않을 것을 염려해서 대안학교에 보내는 것이거든요. 미자 씨는 북한에서도 학교생활과 공부 모두 별 문제가 없었기에 두 자녀를 일반학교에 보낸겁니다. 처음이 어렵더라도 일반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김인선: 한국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사춘기를 겪는 중학교 2학년, 15살 학생들이라는 말이 있어요. 북한에선 춘정기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요. 아이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엄마 말 안 듣고 방문 딱 걸어 잠그는 그런 시기를 말하거든요. 그런데 미자 씨의 둘째 아이가 딱 그 나이에 한국에 입국한 거잖아요. 정착 초반, 한국생활에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사춘기를 겪는 아이까지... 미자 씨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진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