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김명철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명철 씨는 북쪽에서 배를 이용한 부업을 하는 수산노동자였습니다. 배를 고치는 기술도 있었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았는데요. 명철 씨의 아내가 아파서 갖고 있던 배를 팔고 무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죠. 부인을 살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었죠?
마순희: 네. 산부인과 관련한 수술을 받았던 게 문제였는데요. 열악한 의료환경 탓에 상황이 더 안 좋아졌습니다. 세 차례나 더 수술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명철 씨 아내를 담당했던 의사인 산부인과 과장은 연로보장을 받게 됐습니다. 명철 씨는 담당주재원에게 뇌물을 바쳐가며 산부인과 과장의 집에서 아내를 치료받게 했습니다. 불법을 써서라도 아내를 살리고 싶었지만 아내는 저 세상으로 떠났고, 상실감과 허탈감 그리고 북한의 의료실태 등 북한의 실체를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명철 씨는 무산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명철 씨는 중국에서 지내면서 맏누이네 집에 맡기고 온 어린 아들과 남아있는 가족 생각에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안전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먼저 한국행을 결심하고 브로커를 통해 2007년 입국했습니다. 명철 씨는 정착 6일 만에 주유소에서 부업을 시작했고 한 달 만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명철 씨는 식당의 고기 굽는 불판을 닦는 등 다른 부업까지 병행했습니다.
김인선: 명철 씨는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부업부터 시작했는데요. 점차 일자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명철 씨는 북쪽에 있는 아들뿐 아니라 책임져야 할 가족이 더 생겼습니다. 한국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기 때문인데요. 같은 탈북민으로 가족 없이 지내는 서로의 허한 마음을 달래 주면서 정이 들었고 가정까지 꾸리게 됐다고 합니다. 김명철 씨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만큼 커졌습니다. 주유소에서 부업을 계속했지만 거기서는 특별한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4대보험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일하다가 다쳐도 회사와 사회로부터 각종 보장을 받을 수 있고 고용도 안정적이라 4대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을 누구나 선호하게 되잖아요? 더구나 4대보험이 적용되는 회사에 탈북민들이 취업을 하면 취업장려금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명철 씨는 4대보험이 가능한 직장에 취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지인을 통해서 경상도에 있는 탈북민이 운영하는 한 업체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명철 씨는 경상북도 구미에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폐기물을 처리하는 중간업체였다고 하는데요. 온갖 쓰레기들을 분리해서 압착 포장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명철 씨는 망설임 없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가전 폐기물부터 음식물 쓰레기, 중고 의류 따위의 생활에서 발생한 폐기물을 통틀어 생활폐기물이라고 하는데요. 악취가 심하게 나는 경우도 있고 무릎까지 찬 폐기물 사이에서 일하기가 힘들어서 웬만한 각오로는 안 되거든요. 명철 씨가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여러 사람들이 왔다가 한 달을 못 버티고 나간다고 하는데요. 그곳에서 명철 씨는 2년이 넘게 일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와서 경험도 없고 기술도 없는데 일의 귀천을 따질 수가 없었다는 명철 씨는 누구보다 성실히, 열심히 일했다고 하더라고요. 업체의 사장도 같은 탈북민이었기에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했습니다. 급여 외에도 정부에서 업체에 주는 고용지원금까지 고스란히 다 명철 씨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명철 씨는 그 회사에서 더 일하고 싶었지만 한국에 와서 새로 만난 아내의 출산예정일이 가까워지자 할 수 없이 처가 있는 강원도로 올라오면서 폐기물업체에서 퇴사하게 됐습니다. 곧 태어날 아이 생각에 명철 씨는 강원도에 온 다음날부터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중장비업체였는데요. 벽돌이나 시멘트, 모래 등의 물자를 운반하는 상하역 작업을 하는, 쉽지 않은 일을 하는 회사였습니다. ‘연이어 힘든 일만 하셨네요’ 했더니 명철 씨는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냐고 하시더라고요. 명철 씨는 중장비학원에서 취업교육을 받고 자격증도 취득하며 자신 앞에 맡겨진 업무에 항상 최선을 다 했습니다.
김인선: 새롭게 가정도 꾸리고, 안정된 일자리도 있어서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 명철 씨에게도 가장 바라는 일이 있었다고요?
마순희: 네. 북한에 남아있는 아들, 고모집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을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아들 또래의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간절했고 통화할 때마다 아들에게 한국에 와서 함께 살자고 이야기했지만 아들은 단호했습니다. 자신은 어렵더라도 끝까지 북한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더랍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명철 씨는, 아들도 언젠가는 생각이 바뀔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더 열심히 일해서 생활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아들의 마음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달라졌습니다. 공부도, 체력도 남한테 뒤진 적 없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가 탈북했다는 이유로 입대를 거부당하는 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명철 씨 아들은 명철 씨에게 한국으로 가겠다는 연락을 했고, 명철 씨는 그 즉시 아들을 데려오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인선: 기다리던 소식이었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한편으론 걱정도 됐을 테고요. 당시 김명철 씨의 심정이 어땠을지 가늠이 안 되네요.
마순희: 그렇죠. 그때의 명철 씨 심정은 복잡했다고 합니다. 목숨 걸고 와야 하는 위험한 길에 아들을 세우자니 기쁨보다도 근심이 더 많았던 것입니다. 다행히 아들은 명철 씨가 주선한 브로커와 함께 여러 나라를 거쳐 2011년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고 올해 32살, 장성한 청년이 됐습니다. 아들은 명철 씨를 닮아 생활력이 강하고 성실했습니다. 요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대기업 식당의 주방에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한국정착 10여 년 동안 늘 요리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지금 명철 씨의 아들은 본인의 식당을 차리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요. 코로나 시대에도 큰 문제없이 잘 운영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아들이 가게를 차리겠다고 했을 때 명철 씨는 남들처럼 대학에 가서 공부도 원 없이 해 보고 일이나 사업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말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겠다고 할 땐 아들의 독립심을 위해 행여 경제적인 도움이라도 바란다면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는데요. 결국 아들은 누구에게도 손 내밀지 않고 자기사업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습니다.
김인선: 장사하시는 분들 보면, 가족이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하지만 명철 씨는 명철 씨 대로 아들은 아들 대로, 각자의 일에 충실하다고요?
마순희: 네. 아들은 식당운영을 하고, 명철 씨는 건설현장을 떠나 아파트 관리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올해 55살로 나이로 보면 충분히 예전 일을 할 수 있지만 10년 가까이 다니던 중장비업체가 회사부도로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꾸준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김명철 씨! 앞으로도 어떤 상황,어떤 현실에 부닥치더라도 자신만의 끈기와 노력으로 행복하고 성공적인 정착을 이어가시리라고 믿고 또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인선: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인생에 꼭 이루고 싶은 게 있는 사람들의 특징인 거 같기도 한데요. 냄새 나고 힘들어서 금세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다는 폐기물업체에서도, 힘든 일이 많은 중장비업체에서도 명철 씨는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김명철 씨의 삶을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명철 씨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